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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 Insight] 못생긴 대통령은 없다.

“이 시대 나라의 번영을 이끄는 가장 큰 힘은 과학기술입니다. 우리가 선진국을 향한 오랜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 과학기술을 선진 7대국 수준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김진현, 2022:172). 언제 누가 한 말일까?

[전라 Insight] 못생긴 대통령은 없다.

“이 시대 나라의 번영을 이끄는 가장 큰 힘은 과학기술입니다. 우리가 선진국을 향한 오랜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 과학기술을 선진 7대국 수준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김진현, 2022:172). 언제 누가 한 말일까? 1991년 4월 30일 한국과학기자클럽 초청간담회에 참석한 노태우 대통령이 한 발언이다. 흔히 노태우 정부는 1990년 소련과의 수교, 1992년 중국과의 수교 등 북방정책으로 다른 정부와 차별화된다. 하지만, 과학기술정책 분야에서도 상당히 기여했음을 얘기하려고 한다.

노태우 대통령의 ‘과학기술 G7 비전’은 1990년 1월 연두 기자회견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로서는 무모해 보였던 비전을 1990년 벽두에 제시한 이유는 뭘까? 1980년대 후반의 3저 호황 이후 저임금-저가 생산-저가 수출에 기반한 한국 경제의 성장방식이 한계에 부딪혔고 경상수지는 1990년부터 적자로 돌아섰다(아래 그래프 참조). 점증하는 선진국의 기술보호주의에 맞서 핵심 전략기술을 조기에 확보하는 것이 시급했다(홍성걸 외, 2006:4). ‘외국 기술을 도입해 값싸게 생산하는 나라’에서 ‘독자 기술을 개발해 세계시장을 선도하는 나라’로 전환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강했다. 따라서 노태우 대통령의 ‘과학기술 G7 추격’ 선언은 단순한 과학진흥 구호가 아니라, 1990년대를 앞두고 제시된 한국 경제의 발전단계 전환, 국가발전 전략의 전환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노태우 대통령은 왜 ‘10년 후 G7 추격’이라는 장기 목표를 제시했을까? ‘10년’은 1990년에서 2000년까지 국가적 시간표였다. 첨단기술은 한두 해의 예산사업으로 개발할 수 없으므로 장기간에 걸쳐 인력·시설·연구비를 투입하고 축적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한국을 실제 G7 정상회의 회원국으로 만들겠다는 의미가 아니고, 과학기술의 종합 수준을 세계 7위권, 즉 당시 선진 7개국에 필적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비전, 정책적 목표의 제시였다.

누가 언제 이 비전을 구체화했나? 노태우 대통령이 1990년 1월 선언했지만,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실제로 사업이 시작된 것은 1992년 6월, 2년 반이 지나서야 실행되었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 김진현 장관이 1990년 11월 취임하여 2년 가까이 뚝심 있게 밀어붙인 결과였다.     요컨대, 정책의 추진 과정을 보면, 1990년 1월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 「2001년 과학기술 선진 7개국 진입」 비전 제시 → 1990년 11월 김진현 장관 취임 → 1991년 4월 종합과학기술심의회 「2000년도 과학기술 선진 7개국권 진입 추진 기본방향」 보고 → 1991년 8월 종합과학기술심의회 「2000년대 과학기술 G7 진입을 위한 선도기술개발사업」 기획·확정 → 1992년 6월 종합과학기술심의회 「선도기술개발사업 세부추진계획」 확정 → 1995년 「2단계 사업 계획」 → 2001년 「사업 종료」의 順이었다.

‘과학기술 G7 프로젝트(선도기술개발사업)’는 과거의 연구 사업과 어떻게 차별화되는가? 첫째, 10년 기간의 중장기 대형 프로젝트를 선정했다. 과거처럼 단년도 또는 단기 연구지원에서 벗어나 목표 기술과 제품을 정하고 10년간(1992-2001), 3개(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부에 걸쳐 자원을 집중했다. 둘째, 범부처 사업이었다. 과학기술처 단독 사업이 아니라 산업·건설교통·체신(정보통신)·에너지·보건복지·환경 등 8개 부처가 공동 참여했다. 셋째, 산·학·연이 기획 단계부터 참여했다. 특히 정부출연연구기관이나 정부 관료가 연구과제를 정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LG, 삼성, ETRI, 서울대, 연세대, KAIST, KIST 등 민간 전문가에게 실질적인 기획 권한을 부여했다. 넷째, 선택과 집중이다. 작은 과제를 조금씩 지원하기보다는 세계 수준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은 전략 분야를 선택하고 집중했다. 다섯째, 연구 수행기관을 공개 경쟁으로 선정하고, 엄정한 평가를 적용했다(『과학기술 50년사』(2017), 제2편, p.180). 결국, ‘과학기술 G7 프로젝트’는 단순한 연구비 확대 정책이라기보다 국가 R&D 시스템의 운영방식을 바꾼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 차별화 요인은 곧 정책 성공의 요인이었다.

양적으로도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10년간 투입된 연구인력은 9만 명 이상, 10년간 투자된 재원은 정부 1조5,768억 원, 민간 1조7,021억 원 등 총 3조2,789억 원에 달했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유례없는 대규모의 범부처간 연구개발사업이었다(과학기술부, 2003:162).

어떤 기술, 어떤 제품에 선택과 집중을 했나? 예를 들면, 차세대 반도체, 차세대 자동차, 차세대 평판디스플레이, 환경공학 기술, 차세대 원자로, 고속전철 등이었다. 1992년 사업 초기에는 제품기술 7개 + 기반기술 7개 등 14개 후보 분야가 제시됐고, 사업이 진행되면서 최종적으로 제품기술 9개 + 기반기술 9개 등 18개 분야로 확대되었다. 당시 개발 대상으로 선정된 기반기술과 제품기술 18개는 아래 표와 같다.

이처럼 많은 자원을 오랫동안 투입한 기술개발 사업의 결과는 대부분 성공적이었을까? 사업 종료 후 2002년도에 산학연 전문가로 구성된 종합평가단에서 성과 분석을 실시한 결과, 18개 사업의 평가는 ‘아주 우수’ 1개, ‘우수’ 15개, ‘보통’ 1개, ‘미흡’ 1개였다. 2개(감성공학, 초전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우수’ 이상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제도적 성과다. 노태우 정부에서 시작된 ‘과학기술 G7 프로젝트’(선도기술 개발사업)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장기, 범부처, 산학연 협력형 국가 R&D 모델을 적용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OECD도 이 사업을 한국 최초의 범부처 공동 R&D 프로젝트라고 평가했다. 또한, ‘과학기술 G7 프로젝트’는 이후 21세기 프론티어 연구개발사업(김대중 정부) → 차세대성장동력 사업(노무현 정부) → 글로벌 프론티어 사업(이명박 정부) → 미래성장동력 사업(박근혜 정부) 등으로 이어졌다. 중장기 국가 R&D 정책의 계보를 형성한 것이다. 노태우 정부가 북방정책 이외에도 과학기술정책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이유다.

과학기술 정책의 성공은 과학기술자 출신 장관을 임명했다고 바로 다가오는 게 아니다. 非과학자 출신이라고 해도 국가와 과학기술의 발전에 진심인 사람, 정책의 실현과 목표 달성을 위해 자신이 보유한 모든 자원을 기꺼이 투입할 의사가 있는 정책선도자(policy entrepreneur), 대통령을 프레스센터의 한국과학기자클럽 초청간담회에 사상 최초로 모시고 갈 정도로 열정적인 사람을 임명한다면 정책 성공(policy success)에 가까워질 것이다.

정책선도자 김진현 장관의 주도로 시작된 ‘과학기술 G7 프로젝트’는 분명한 성과의 창출(프로그램 평가), 정책 과정의 공정성(과정 평가), 정치적 지지와 정당성(정치적 평가), 성과의 지속성(지속성 평가) 등 정책 성공의 4가지 평가요건을 모두 충족시키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 정책을 성공 사례로 다루려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못생긴 대통령은 없다.”, 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전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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