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이재명이 1950년 이승만을 소환했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과 농지개혁의 어젠다로 말이다. 그러자,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나이 들어 전답을 남에게 맡기고 도시로 나와 사는 분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농지 관리가 엉망이다, 농지까지 투기 대상이 돼 버렸다, 전수조사를 하라는 이재명 대통령의 2026년 2월 24일 국무회의가 도화선이 됐다. 부동산 투기와 상관없는데, 고령과 질병 등 부득이한 경우마저 강제 처분한다는 거냐는 불만이 거세지자, 지난 9월 18일 기자회견에서 ‘부동산 투기가 명확한 걸 가려내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농지 관리가 엉망이란 얘기가 나올 정도로 2026년 현재 자작지 비율은 50% 정도에 불과하다(<표1> 참고). 해방 후 35% 정도에서 1950년 농지개혁 후 95%까지 급등했던 자작지 비율은 산업화, 도시화, 고령화의 진전으로 감소 추세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는 농민들이 자경하고 싶어도 지주-소작제로 인해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고령화 등의 영향으로 농사짓기 힘든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논밭을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상은 같아도 원인은 전혀 다르다.
현재의 문제가 시작된 1945년으로 돌아가 보자. 농지개혁은 광복 이후부터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고, 1946년 3월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式 농지개혁 이후에는 뜨거운 감자가 됐다. 이승만 정부의 유상매수, 유상분배 式 농지개혁은 우여곡절 끝에 1950년 6.25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관련 법령과 조직, 열람, 이의제기 등 시행 준비를 완료했다. 1950년 시작된 농지개혁은 농촌 사회의 변화는 물론 6.25 전쟁과 이후의 경제성장 등에 영향을 미쳤다.
먼저, 농지개혁은 농촌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해방 이후 자작지 비율은 35%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1948년 美 군정의 귀속농지 불하 26.8만 정보(1정보=3천 평, 15마지기), 1950년 농지개혁 31.7만 정보, 지주 처분 70.4만 정보가 자작화되었다. 그 결과, 1950년 현재 자작지 비율은 92.4%로 일본의 농지개혁 성과(90%)를 능가(김성호, 2001:269)했다.
<표2>에서 보듯이, 1949년 통과된 농지개혁법의 보상地價(15할=1년 생산량의 150%)는 일제 때 地價(60할)의 거의 1/4 정도로 혁명적 수준(김성호, 2001:264)이었다. 15할은 19세기 후반의 농지 시세(30할~40할), 1948년 3월 美 군정의 귀속농지 불하 가격(30할), 1949년 초 한민당 중심의 국회案(30할), 농지개혁 이전의 시세(20할~30할)보다 낮았다.
여러 제안 가운데 농림부 案이 농민들에게 유리한 개혁적인 제안임을 알 수 있다. 지주들 중심의 한민당을 견제하고 농민들의 지지를 확고히 하려 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진보 좌파 성향의 조봉암 의원을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했고, 동경제대 출신으로 이론과 현장에 밝은 ‘농정학의 개척자 강정택’(이문웅, 2024) 차관과 진보 성향의 현장 전문가 강진국 농지국장 등이 참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농민들은 1년에 3할(생산량의 30%)이라는 과중한 부담으로 짧은 기간(5년)에 상환토록 하고, 지주들에게는 정부가 준 지가증권으로 귀속재산 불하에 참여할 수 있는 혜택을 줬으며, 소작면적 145만 정보의 22%만 분배되었다는 점에서 1950년 농지개혁에 비판적인 평가(김병태, 1981:48)도 있다. 하지만 1년에 3할(30%)은 조선 후기와 일제 강점기의 소작료 50%는 물론 광복 이후 美 군정이 설정한 소작료 상한(33.3%)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또한, 김성호 외(1989), 홍성찬 편(2001) 등은 낮은 상환地價(15할)와 95% 가까운 자작지化라는 성과를 들어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에 호의적이다. 필자가 보기에도,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은 프로그램(성과), 정책 결정 과정, 정치적 지지, 성과의 지속성 등의 측면에서 대체로 성공적이다. 대만과 일본의 농지개혁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
그리고, 인구 70%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요구, 북한과의 체제 경쟁, 美 군정의 귀속농지 불하, 제헌헌법 86조(“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 등의 조건 하에서 농지개혁은 피할 수 없었다. 따라서, 김성수 등 대지주들이 주도했던 한민당(보수 우파)은 농지개혁을 늦추면서 지주들에게 ‘높은 지가(30할)’로 보상하려 했다. 하지만, 제헌의회 의원들은 ‘낮은 보상地價(15할)’를 선택했다(<표3> 참고).
둘째, 농지개혁은 6.25 전쟁의 시작과 끝에 영향을 미쳤다. 사쿠라이(櫻井浩, 1983), 김성호(2001:264) 등에 따르면, 북한의 김일성은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을 와해시키려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 남침했다. 남침 이후 북한의 농지개혁 요원들이 내려와 서울과 경기 일원에서 북한식 농지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이름이 적힌 농지 대장을 열람했던 농민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6.25 와중에 박헌영 등이 농민들의 폭동을 선동했지만 역시 먹히지 않았다. 북한의 생각과 달리 전쟁은 쉽게, 빨리 끝나지 않았다.
셋째, 농지개혁은 경제성장에도 기여했다. 세계은행(2003)에 따르면, 한국 대만 일본 중국 등 토지분배의 지니계수가 낮은 (다수의 농민들에게 토지가 골고루 분배된) 국가일수록 경제성장률이 높았다(아래 그림 참고). 그리고, 농촌경제연구원의 ‘농지개혁사 자료집’(1984)에 의하면, 귀속재산 특별회계로 불입된 지가증권 금액은 지주에게 보상한 180억 원의 절반이 넘는 100억 원이었다. 즉, 정부가 지급한 지가증권(보상총액)의 절반 이상이 지주의 손을 떠나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었고,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촉발시켜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에 공헌한 점이 없지 않다(김성호, 2001:276).
이처럼 농지개혁은 농민과 농촌 사회의 변화는 물론 6.25 전쟁의 시작과 끝, 한국경제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남북 분단이다. 1948년 북한과 1950년 대한민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출발한 농지개혁의 여파는 2026년 현재 진행형이다. “북한의 토지개혁이 김일성 정권을 낳고 남한의 농지개혁이 이승만 정권을 낳음으로써 전개된 남북한의 체제적 대립은 그 후 美蘇 냉전이 종식된 50년 후까지도 이곳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게 하였다”(김성호, 2001:278).
1950년에서 2026년 현재로 되돌아오자. 유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의 농지관리 정책은 어떤 미래를 향해 가고 있나? 농업의 기계화·스마트화는 물론 농촌인구의 고령화·과소화 추세에 대응하려면, 임대차 자체를 없애기보다는 투기적 소유를 억제하면서 실제 임차농의 경작권을 합법적이고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방향으로, 자작농과 임차농의 규모 및 소득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전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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