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적 구조서 벗어나 기업 간 경계 허물어
KF-21 무장비행 시험. 사진=한국항공우주산업(KAI)
[주간한국 송철호 기자] 국내 방위 산업이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다. 과거 ‘각자도생’에 가까웠던 폐쇄적 구조에서 벗어나 기업 간 경계를 허무는 ‘합종연횡’이 본격화되는 모습이다. 글로벌 수요 확대와 지정학적 리스크 고조라는 외부 환경 변화 속에서 협력 중심 생태계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올 들어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현대로템, LIG넥스원,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 이른바 ‘방산 빅4’ 간 협력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지상은 한화와 현대로템, 항공은 KAI, 유도무기는 LIG넥스원’으로 불리던 전통적 구분이 점차 흐려지면서 각 기업 간 경계가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개방형 협력 생태계’로 전환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차세대 전투기 사업을 둘러싼 협력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KAI·LIG넥스원은 KF-21과 FA-50에 탑재될 국산 항공 무장 개발과 체계 통합을 위한 전략적 협약을 체결했다. 이는 단순한 부품 공급을 넘어 ‘플랫폼-무장-체계 통합’까지 아우르는 협력 모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동안 국내 항공 무장은 해외 의존도가 높았지만 이번 협력을 통해 국산화율을 높이고 수출 경쟁력까지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특히 KF-21은 향후 한국 방산 수출의 핵심 플랫폼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관련 생태계를 국내 기업 중심으로 구축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3사는 ▲KF-21과 FA-50 공대공·공대지 등 항공 무장에 대한 공동 기술 검토 및 체계 통합 ▲무장 포트폴리오 다양화 ▲공동 마케팅 강화 등 협력 방안을 넓히기로 했다. 이에 국방과학연구소(ADD)가 주도하는 장거리 공대공·공대지 유도탄 등의 체계개발 사업을 안정적으로 수행하고 KF-21 능동위상배열(AESA) 레이더와 유도탄 간 무장 데이터링크를 구축할 전망이다.
방산업계 관계자는 “3사는 긴밀한 협력으로 KF-21과 FA-50 등 국산 항공기 플랫폼과 K무장의 패키지 수출 기반을 마련하고 공동 마케팅을 통해 수출 시장 확대를 위한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전략”이라며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 지역 국가들은 항공기 플랫폼을 비롯해 장비·무장을 통합한 패키지형 제품 제안을 선호하고 있어, 이번 전략적 협력은 향후 중동 시장 진출을 위한 포석으로도 평가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지상 분야에서도 협력 흐름이 뚜렷하다. 현대로템과 LIG넥스원은 유·무인복합체계(MUM-T)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첨단 무기체계 개발 사업에서 쌓아온 기술력을 기반으로 MUM-T에 대한 연구개발(R&D) 및 투자를 지속해 온 LIG넥스원은 현대로템과의 전략적 협력을 통해 빠르게 확장하는 미래전 시장을 주도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달라진 K방산의 경쟁 구도
한화그룹의 행보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한화는 최근 KAI 지분을 약 7년 만에 다시 확보하며 양사 간 연결고리를 복원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한화그룹은 방산 계열사를 중심으로 KAI 지분 4.99%(486만 4000주)를 확보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그 자회사가 4.41%, 한화시스템이 0.58%를 각각 매입했다.
앞서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2018년 KAI 지분 5.99%를 전량 매각한 바 있다. 당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측은 초기 투자 비용이 많이 드는 항공기 엔진 관련 국제 개발 공동 사업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매각 배경을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느슨했던 한화와 KAI의 협력 관계를 다시 전략적 동맹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신호”라며 “특히 글로벌 방산 시장에서 패키지 수출이 일반화되는 상황에서 두 업체가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해 글로벌 수출을 확대하겠다는 전략”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방산을 넘어 이종 산업과의 협력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PUBG: 배틀그라운드’ 제작사 크래프톤과 ‘피지컬 인공지능(AI)’ 공동 개발에 나선 것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지난 13일 크래프톤과 ‘AI 기술 공동 개발과 합작법인 설립 등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이번 협력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보유한 방산·제조 인프라, 무인 시스템 기술에 크래프톤의 AI 연구 역량과 소프트웨어 개발 기술을 결합해 추진된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무기 체계 운용 역량을 바탕으로 실제 환경에서 작동하는 피지컬 AI 기술의 완성도를 높이고 단계적인 실증을 통해 현장 적용 가능성을 검증해 나갈 예정이다.
특히 크래프톤이 게임 산업을 통해 축적해 온 데이터 운영 경험과 가상 환경 기반 시뮬레이션 기술은 피지컬 AI의 학습과 검증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양사는 장기적으로는 우주항공 분야까지 협력을 확대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손재일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대표는 “AI 기술이 산업을 넘어 방산 분야에서 활용되는 피지컬 AI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며 “크래프톤과 협력을 통해 피지컬 AI와 미래 방산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 패러다임을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게임은 물리 엔진과 가상 환경 시뮬레이션 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산업이다. 이를 활용하면 실제 전장 데이터를 확보하기 어려운 방산 분야에서도 다양한 시나리오 기반 학습이 가능해진다. 특히 자율주행 무기체계나 무인 전투 시스템 개발에 있어 가상 데이터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만큼, 이번 협력은 단순한 실험을 넘어 미래 기술 확보를 위한 핵심 전략으로 풀이된다.
방산업계 관계자는 “K방산의 경쟁 구도는 ‘개별 기업 간 경쟁’에서 ‘생태계 간 경쟁’으로 전환되고 있다”며 “다만 기업 간 이해관계 조정, 기술 보호 문제, 수익 배분 구조 등은 협력 확대 과정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로 꼽힌다”고 말했다.
송철호 기자 song@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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