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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자찬묘지명」과 회고록 쓰기 운동

또 AI 프로그램을 회고록 출판에 활용한 사례들도 언론에 소개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기록은 '나를 찾는 일'이며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치유하는 시간"이라고 입을 모은다. 비록 200년 가까운...

「자찬묘지명」과 회고록 쓰기 운동

비록 200년 가까운 세월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다산의 「자찬묘지명」이나 지금 붐이 일고 있는 회고록 쓰기나 ‘나를 만나고 나를 찾는 글쓰기’라는 점에서는 고금이 서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굿모닝충청 김창수 도시공감연구소장)

[굿모닝충청 김창수 도시공감연구소장]

“나는 왜 쓰는가?” 이 존재론적 질문은 조지 오웰이 쓴 한 편의 에세이에 등장한다.

순수한 이기심, 심미적 열정, 진실한 사실을 후세에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감, 사회변화에 대한 열망. 이 네 가지가 그가 자문자답하는 글쓰기의 동기이다.

오웰은 그러나 이 네 가지 동기가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서로 견제하고 긴장해야 하며, 그중 무엇이건  결국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일에서 글쓰기가 시작된다고 결론짓는다.

다산의 저작을 읽다 보면 오웰의 위와 같은 분석이 매우 주효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산이 쓴 500여권의 저작에는 진리에 대한 천착과 개혁에의 열망이 가득 차 있다. 자기과시나 지적 허영에 물들지  않으면서 사실관계를 결코 허투루 다루지 않는다.

2500여수에 달하는 시에서도 병든 사회를 고발하는 사회시가 있는가 하면, 자연의 아름다움에 공감하고 찬미하는 서정시도 있다.

다산의 글 가운데 오웰이 말한 네 가지 동기를 가장 압축적으로 잘 담고 있는 작품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 「자찬묘지명」을 들겠다. 그가 1822년 회갑 때 쓴 「자찬묘지명」은 정말로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자찬묘지명」은 그러나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성격의 글은 절대 아니다. 우선 묘지명이란 장르 자체가 그렇다. 죽은 이를 기리는 일종의 비지류(碑誌類)인 묘지명은 일상의 삶에서는 쉽게 나올 수 없는 글이다.

또 남이 아닌 자신이 직접 쓴 ‘자찬’(自撰)묘지명은 당대의 사회에서도 드물었다. 이런 글쓰기 스타일부터 그의 「자찬묘지명」은 종전과는 형식 자체가 다른, 파격의 고백록(告白錄)이라 할 수 있다.

지금으로 보면 자전적 회고록이라 할 수 있는 다산의 「자찬묘지명」은 두 가지 버전으로 돼있다.

문집에 넣어 전하는 집중본(集中本)과 무덤 속에 넣기 위해 만든 광중본(壙中本)이 그것이다. 두 버전 모두 “이 묘는 열수 정약용의 무덤이다.”라는 동일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집중본은 총 1만2313자로 장문이나 광중본은 전문이 1015자로 간략하다.

그렇다면 다산은 왜 굳이 집중본과 광중본 두 가지 다른 버전의 묘지명을 만들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왜 묘지명을 써서 남기려 했을까?

또 그는 왜 이 「자찬묘지명」을 비본(秘本) 즉, 비공개 문서로 후손들에게 숨겨두도록 했을까?

「자찬묘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보기 앞서 이 수수께끼부터 풀어 보자.

우리는 다산이 유배 초기인 1802년 12월 학연과 학유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 볼 수 있다.

“너희가 끝끝내 배우지 아니하고 스스로 포기해 버린다면 내가 해놓은 저술과 간추려 놓은 것을 누가 모아서 책으로 엮고 교정하며 정리하겠느냐?

이 일을 못한다면 내 책들은 더 이상 전해질 수 없을 것이며, 내 책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후세는 단지 사헌부의 계문(啓文)과 옥안(獄案)만 믿고서 나를 평가할 것이 아니냐?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취급받겠느냐?”(박석무 편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중 ‘두 아들에게 붙여’)

편지에서 보듯 다산은 그의 학문적 연구와 저작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 경우, 사헌부의 감찰문서나 수사상의 조서만으로 후세에 평가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절박한 위기의식과 불안감이 있었다.

바로 이러한 심리상태가 자연적 수명의 한계점이던 회갑을 맞아 자신이 직접 사태의 전말을 기록으로 남겨야 하겠다는 동기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문집으로 전해지는 집중본이 광중본 보다 10배 이상 길어진 이유이기도 하겠다.

또 유배형을 불러 온 신유사옥의 전말을 상세히 기술하다보니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비본’으로 감추어 둘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저술 동기가 그러하듯 다산은 「자찬묘지명」에서 신유사옥의 발단이 되었던 신해(진산)사건에서부터 황사영백서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 시말을 상당히  길게 서술했다.

특히 정조 사후 숨가쁘게 진행되는 옥사의 전개과정을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듯 사실적이고도 극적으로 묘사하는가 하면 주역들의 이름도 실명으로 공개했다.

역사의 법정에 실체적 진실을 알리고 모해자들을 고발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와 용기가 발휘된 대목이다.

그렇다고 다산이 자신의 생애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만 거론한 것은 아니다.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킨 서사도 그는 묘지명에 담고 있다.

“나는 해변가로 귀양을 가자 ‘어린 시절에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20년 동안 속세와 벼슬길에 빠져 옛날 어진 임금들이 나라를 다스렸던 대도(大道)를 알지를 못했다. 이제야 겨를을 얻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야 흔연스럽게 스스로 기뻐하였다”

귀양살이가 대도에 이르게 만든 겨를이 되었다는 이 위대한 반전. 묘지명은 이어 육경과 사서에 대한 연구와 그의 성과로 나타난 저작물들의 개요를 담담히 써내려 간 뒤 다음글로 마감한다. 다산의 생애와 학문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자찬묘지명」의 피날레다.

“내 나이 예순이다. 나의 인생 한 갑자 60년은 모두 죄에 대한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이었다. 이제 지난날을 거두려고 한다. 거두어 정리하고 생을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진정으로 올해부터 빈틈없이 촘촘하게 내 몸을 닦고 실천하며, 저 하늘이 나에게 던지는 지상의 명령, 나의 본분이 무엇인자 돌아보면서 여생을 마치리라“

김창수 도시공감연구소장.

최근 회고록 쓰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전 국민 회고록 쓰기 운동’ 출범식이 지난 3월24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데 이어 50명의 발기인들이 온라인 플렛폼 ‘memory network.org'를  만들었다 한다.

또 AI 프로그램을 회고록 출판에 활용한 사례들도 언론에 소개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기록은 ’나를 찾는 일‘이며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치유하는 시간”이라고 입을 모은다.

비록 200년 가까운 세월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다산의 「자찬묘지명」이나 지금 붐이 일고 있는 회고록 쓰기나 ‘나를 만나고 나를 찾는 글쓰기’라는 점에서는 고금이 서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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