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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은 힘” [크리틱]
2026-06-24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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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소, 자본=창의력, 1986/1990.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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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승 | 미술사학자·상명대 초빙교수
“아이고, 내 팔자야.”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팔자소관이라고도 한다. 이때의 팔자는 실제로 여덟 글자다. 사주명리에서는 태어난 연월일시를 네개 기둥으로 세워 땅과 하늘의 글자 두개씩을 준다. 글자마다 색도 있다. 불의 성질인 붉은색, 흙의 노란색, 물인 검은색, 쇠의 흰색, 나무를 닮은 녹색. 사람의 인생도 물, 불, 흙, 나무, 쇠 자연의 속성으로 파악하는 이치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세계를 도형으로 설명했다. 모든 면이 똑같고 각 꼭짓점에서 만나는 면의 개수도 똑같은 입체를 정다면체라 한다. 세상에 다섯 개만 존재하는 정다면체로 플라톤은 우주와 물, 불, 흙, 공기 4원소를 풀어냈다. 뾰족한 정사면체는 불, 안정감 있는 정육면체는 흙, 가벼운 정팔면체는 공기, 잘 구르는 정이십면체는 물에 비유했다. 그리고 우주의 형상을 정십이면체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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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모양이 다른 듯 비슷하다. 세상사를 표현하자니 글도, 그림도 필요했던 셈이다. 이런 글과 이미지를 기호라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새 전시 포스터를 보면서 뜬금없이 떠오른 생각들이다. 전시는 ‘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로, 미술이라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헷갈린다. 작품은 볼 것보다 읽을 게 많아 전시 좀 봤다 할 관객도 어려울 수 있다. 그런데 문자나 이미지나 기호이긴 매한가지니, 그림 대신 글이구나 하면 그게 개념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2026년 기획전 ‘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 전시장 전경. 사진 강혜승
그렇게 읽다 보니 슬쩍 웃음이 샜다. “독일의 요제프 보이스의 그림을 내가 번역했다”는 덧글이 붙은 작품 앞에서였다. 금색 글자로 ‘자본’이라 쓰고 검은 붓글씨로 ‘창의력’이라 번역한 작품명 ‘자본=창의력’이다. 이 천연덕스러운 작가는 1980년대 미국으로 떠나 원래 이름 대신 ‘박모’라는 익명의 박씨로 활동하다 1990년대 중반 귀국해 ‘박이소’라는 활동명을 사용했다. 서구 중심의 미술계에서 주변부 목소리를 내는 번역자를 자처한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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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그가 번역했다는 작품의 원작자 보이스(1921~1986)는 전위예술가로 ‘자본’을 주요 테마로 삼곤 했다. 독일어 ‘자본(DAS KAPITAL)’으로 포스터도 찍고 전시공간도 꾸렸던 보이스는 1977년 작품에서 미주개발은행의 채권 발행 공고가 실린 지면 위에 물감을 덧발라 빼곡한 숫자 일부를 지우고 ‘창의력=자본’이란 제목을 붙였다. 인간의 창의력은 돈이 아닌 방식으로 생산적일 수 있다는 의미였다.
박이소는 이 외국어를 종이 위에 한국말로 옮겨 쓰며 ‘자본=창의력’이라고 뒤집었다. 앞뒤 순서를 바꾸니 어감이 달라진다. 물질주의를 비판한 활동가였던 보이스 역시 창의력을 자본이라는 경제 가치로 치환했다는 비꼼이 묻어난다. 물론 보이스에게 창의력과 등치된 자본은 일을 수행하는 능력이자 사회를 바꾸는 힘이었지만, 박이소가 볼 때 자본 중심의 사고이자 이상주의였던 셈이다.
황금빛 자본 앞에 검은 붓글씨로 쓴 창의력은 무력해 보이기도 한다. 박이소가 작품을 제작한 해는 보이스가 사망한 1986년이었다. 자본에 좌우되는 미술계 현실을 향한 작가의 냉소는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순간 일론 머스크가 상상하는 우주 사업에 몰린 세계의 욕망이 작품과 겹쳤다. 역시 자본은 창의력이다. 웃은 게 웃은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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