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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일제에 맞선 계몽운동가, 홍와 이두훈 선생

구한말 대구에서 일제에 저항해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의 고령지역 거두 홍와 이두훈 선생을 아시나요.

일제에 맞선 계몽운동가, 홍와 이두훈 선생

고령 출신·국채보상운동 앞장

을미사변 비난·단발령 철회 촉구

미국 등 한양 주재 공사관에

침략 행위 규탄 포고천하문 전달

정부, 2015년에 건국포장 추서

홍와 이두훈 선생

구한말 대구에서 일제에 저항해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의 고령지역 거두 홍와 이두훈 선생을 아시나요.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 선생(1856∼1918)은 경북 고령군 출신의 유학자다. 고령지역 민족 독립을 위한 계몽운동의 선구자로 특히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이두훈 선생은 어린 시절 성주에 있던 유학자 이진상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 그러다가 일제의 습격이 거세지던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발표되자 이듬해 동문들과 함께 상경해 상소문을 올렸으나 수령을 거부당했다. 을미사변을 비난하고 단발령 철회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전해져 있다.

이어 일제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는 포고천하문을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한양 주재 각국 공사관에 전달했다. 이두훈 선생의 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

그가 활약했던 조선 국권 회복 운동의 방점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다. 그해 1월 말 대구 광문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때 고령지역에서는 유림들을 중심으로 단연상채회(斷煙償債會) 결성이 추진되고 있었다.

당시 대구에는 담배를 끊어 100원, 200원씩 모아 1천300만원에 달하는 국채를 갚자는 의미의 ‘대구단연회(大邱斷烟會)’가 있었다. 이 조직의 회장이던 이현주 선생은 1907년 1월 24일(음력) 국채보상운동에 협조해 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고령향교에 보냈다. 조선시대 각지의 향교는 그 지역 유림들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다.

취지에 공감한 고령 유림들은 향약회 중심으로 단연상채회를 조직하고 이두훈 선생을 총책임자로 추대했다. 다음 날인 1907년 1월 25일 홍와를 고령군 단연상채회사 도회장에 임명한다는 돈청문을 작성했다. 이에 대해 홍와는 “대의에 공감하고 동지들의 추대를 거스를 수 없다”는 뜻에서 수용했다고 전해진다.

이때부터 이두훈을 필두로 한 단연상채회는 고령군 각 면에 공문을 보내 의연금 모금을 독려했다. 각 면의 인구 현황을 조사해 얼마만큼의 돈을 모을 수 있는지 파악했고 누가 얼마를 냈는지에 대한 사실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다산면을 비롯한 각 면에서 의연금에 대한 보고서도 올라왔다.

이러한 노력은 일제와 조선통감부의 방해로 국채보상운동이 무산되면서 빛바랜다. 하지만 이두훈 선생의 후손들이 고령지역 국채보상운동과 선생에 대한 기록을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후 기록은 빛을 발하게 된다. 지난 2017년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면서다.

이두훈 선생에 대한 각종 기록을 엿볼 수 있는 전시회가 마련된다.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순회전 ‘[IT:다,1907] AI로 잇는 국채보상운동’에서 대구단연회 이현주 간찰, 단연상채회의 돈청문, 의연금 장부 등 54점의 사본을 전시할 예정이다.

순회전은 오는 8월 18일∼9월 16일 고령 대가야문화누리 전시실, 9월 19일∼10월 25일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록전시관에서 열린다.

정부는 이두훈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박용규기자 pkdrgn@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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