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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인문학, AI 시대 의학 교육의 핵심[지금, 대학을 묻다]

인공지능(AI)이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환자 정보를 분석해 진단 알고리즘을 제시하고, 임상 의사결정... 역설적이게도 AI 시대의 의학 교육이 가장 공을 들여야 할 분야는 인문학이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환자의...

인문학, AI 시대 의학 교육의 핵심[지금, 대학을 묻다]

편집자주

'벚꽃 피는 시기로 망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한국의 대학은 위기다. 상아탑의 권위를 지키면서도 변화한 사회에 맞는 인재 배출에도 충실한 새로운 대학의 좌표를 전문가 칼럼 형식으로 제시한다.


현대 의학 지식의 양은 지수함수적으로 팽창하고 있다. 1950년대에는 의학 지식의 총량이 배가되는 데 50년이 걸렸지만, 이제 그 주기는 70일 이내로 단축됐다. 이는 더 이상 암기 위주의 전통적 교육 방식이 유효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인공지능(AI)이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환자 정보를 분석해 진단 알고리즘을 제시하고, 임상 의사결정 시스템이 수시로 갱신되는 시대다. 의대생들이 강의실에 모여 방대한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받는 방식은 근본적 인식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미국의 주요 의과대학들은 대형 강당에서의 일방향식 강의를 대폭 줄이고, 문제중심학습(PBL) 방식의 소그룹 토론 수업 위주로 전환하고 있다. 대학들은 상당한 재원을 투입해 강의 전담 교수(Teaching Faculty)를 채용하고 교육의 질을 체계적으로 관리한다. 수업의 중심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학생 스스로 정보를 탐색하고 비판적으로 해석하며 동료와 협업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놓여있다. 의학 분야에서도 지식의 '보유'보다 '활용'과 ‘판단’이 핵심 역량이 됐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AI 시대의 의학 교육이 가장 공을 들여야 할 분야는 인문학이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환자의 서사(narrative) 속에서 질병의 의미와 삶의 맥락을 읽어내는 '서사 의학(Narrative Medicine)'의 가치가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환자의 검사 수치 너머에 있는 고통과 삶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치료의 길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은 기계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인간 의사’의 영역이다. 미래의 의사는 '걸어 다니는 의학교과서'가 아니라 환자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하는 ‘성숙한 동반자’가 돼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의 의학 교육은 이러한 미래 지향적 논의에 역행하고 있다. 지난 정부의 무리한 의대 정원 확대 정책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학생들의 휴학·유급 사태는 의학 교육 현장을 심각한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다. 당장 올해부터 24학번부터 26학번까지, 이른바 '트리플링' 세대가 한꺼번에 강의실로 쏟아져 들어오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기초적인 강의실 공간은 물론 해부학 실습용 사체(cadaver)와 실습 기자재조차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소그룹 토론이나 밀착 지도는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다. 인프라가 뒷받침되지 않은 양적 팽창은 교육의 질적 퇴보를 넘어 의학 교육 시스템의 붕괴를 초래한다. AI와 공존하며 환자의 마음을 어루만질 의사를 키워내야 할 골든 타임에, 우리는 오히려 과거의 열악한 주입식 교육 환경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논의의 초점은 증원 그 자체를 넘어 '증원된 인원을 어떻게 제대로 교육할 것인가'에 맞춰져야 한다. AI 시대를 선도할 혁신적인 교육 모델을 수립하고, 이를 뒷받침할 과감한 인프라 투자와 제도적 정비가 병행돼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숫자만 늘어난 의사가 아니라, AI 시대에 걸맞은 교육과 수련을 통해 길러진 미래형 의사다.

의학적 지식의 파편에 함몰되지 않고, AI가 창출한 데이터와 환자의 숨겨진 이야기를 통섭하여 읽어낼 수 있는 역량 있는 전문가를 길러내야 한다. 붕괴 직전의 교육 현장을 재건하여 미래형 의학 교육 시스템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미래 세대를 위해 풀어내야 할 가장 시급한 숙제이다.



민정준 화순전남대학교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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