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연구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사과·양파·쌀·한우처럼 특정 ‘품목’을 향한 품목연구, 유전체·스마트팜·인공지능(AI)처럼 기능과 수단을 다루는 기능연구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아무리 화려한 기능연구라도 품목을 통하지 않으면 농업현장에 도달할 수 없다.
지금 우리 농업연구의 중심은 품목에서 기능으로 아주 많이 이동해 있다. AI 열풍은 이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그 저변에는 AI를 활용하면 각 품목의 상황은 저절로 좋아질 것이라는 일종의 맹신도 엿보인다.
하지만 최근 양파의 사례는 우리가 기능연구를 강조해오는 동안 핵심 품목이 얼마나 취약해졌는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양파산업 전체의 경쟁 상황이 변하는 동안 우리는 양파라는 ‘품목’은 보지 못하고 첨단 농업기술만 보고 있었다. 어느새 중국산 양파가 국산 양파보다 비싸도 선택받는 상황이 벌어져버렸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양파가 시작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마늘·고추·배추와 같은 우리 밭농업의 핵심 품목들이 중국발 ‘품목 쓰나미’를 버텨낼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농업현장과 실제로 맞닿아 있는 연구는 언제나 품목연구다. 사과농가가 스마트 과원을 만들고 생육 데이터를 들여다보는 이유는 결국 더 좋은 사과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양돈농가가 축산 AI 플랫폼에 관심을 갖는 것도 언젠가는 더 좋은 돼지를 생산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농업연구는 기능이 아닌 품목을 종착지로 삼아야 하고, 농업연구자는 자신의 연구가 목적하는 품목을 한시라도 잊으면 안된다. 농업연구의 결과는 언제나 기능이 아닌 품목을 통해 구현된다.
이 점에서 유럽 농업현장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럽 농업현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아날로그’에 가깝다. 디지털 기술이나 첨단 바이오 기술을 싫어해서가 아니다.
품목을 목적으로 하고, 기능은 필요할 때 그만큼만 거들기 때문이다. 사과·감자·양파 같은 특정 품목의 생산성과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과정에서 “이 단계에서는 디지털이나 바이오 기술이 꼭 필요하다”라는 판단이 설 때만 기술성과 경제성을 따져 최소한의 기능만 탑재한다. 유럽에서 발달한 품목협의회(Commodity Board)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품목 자조금을 기반으로 해당 품목을 둘러싼 기후위기, 농촌 인구구조 변화, 국제 경쟁 구도를 진단한 뒤 이렇게 묻는다. “이 문제는 연구개발로 풀 것인가, 산업구조로 대응할 것인가. 단기 처방인가, 10년 전략인가?” 그 결과가 연구 과제이기도 하고, 유통 개편이기도 하며, 때로는 재배면적 조정이 되기도 한다.
흔히 네덜란드 농업이 강하다고 한다. 이 나라가 잘하는 건 ‘농업 전반’이 아니다. 화훼·과채류·첨단식품이라는 품목에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결과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낮은 소득과 유통이 문제다”라고 불평한다. 총량적 접근은 농업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 농업도 품목으로 헤쳐 모여야 하고, 농업연구 역시 품목 중심으로 접근해야 한다.
농업연구의 성패는 기술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 기술이 어떤 품목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쓰이느냐에 달려 있다. 농업은 언제나 품목에서 시작해 품목으로 끝난다. ‘품목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은 기술은 농업현장에 닿지 못한다.
이주량 한국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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