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가 서비스업' 잠식에 나선 AI 기술
제조업의 AI 고도화, 한국의 미래 달려
전례 없는 현장 중심 산학협력 체계 필요
편집자주
글로벌 AI 경쟁이 몰고 올 변화의 물결과 그에 대한 대한민국 전반의 대응 방안을 생생한 사례를 곁들인 현재진행형 문체로 전달합니다.
지난해 9월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뒷줄 왼쪽 네 번째) 미국 대통령이 샴 산카(앞줄 왼쪽 다섯 번째) 팔란티어 최고기술책임자(CTO) 등 미국의 주요 빅테크 수뇌부를 초청, AI 혁명 등 정보기술 분야에서의 새로운 변화에서도 미국의 경쟁력 우위를 지킬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Software is eating the world.”(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어 치우는 중이다.)
지금은 미국 3대 벤처캐피털로 성장한 'a16z' 공동 설립자 마크 앤드리슨이 2011년 선언한 이 한마디는 시대의 전환점이었다. 데이터 기반 소프트웨어가 모든 산업을 다시 쓰기 시작하며 소프트웨어 서비스 르네상스가 열렸다.
그해, 필자는 서울대 실험실 벤처를 인수한 SAP에서 필자의 팀이 개발을 주도한 HANA(고성능 분석 어플라이언스) 기반의 실시간 전사적 자원관리(ERP)·고객관계관리(CRM) 시장 진출을 이끌고 있었다. SAP는 이 플랫폼으로 재도약해 한때 시가총액 3,400억 유로(약 590조 원)에 달했지만, 지금은 1,900억 유로 수준으로 반 토막 났다. 세일즈포스, 워크데이, 서비스나우, 스노플레이크 등 기존 소프트웨어 강자들 역시 같은 압박을 받고 있다. 이제는 인공지능(AI)이 세상을 먹고 있기 때문이다.
앤스로픽이 클로드 코드·코워크로 촉발한 AI 에이전트 패러다임의 부상은 금융 시장에 충격을 주었고, 최근 중동 분쟁에서 보듯 전쟁과 정부 운영 방식까지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거대한 일체형 소프트웨어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인간이 목표를 정의하면 AI가 전략·실행 계획을 세우고 하부 소프트웨어까지 자동 생성하는, 가볍고 모듈화된 자율 에이전트의 네트워크로 기업과 군, 정부, 대학을 운영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 패러다임 변화의 진원지는 실리콘밸리다. 앤스로픽은 인튜이트와 손잡고 세무·재무 AI 에이전트 시장에 진입했다. 개인의 세금 상담과 신고는 물론, 재무 전반을 케어하는 AI 에이전트로 발전할 것이며, 기업으로 확장되면 매출 관리·캐시플로·세금 신고·분기별 감사까지 자동화될 것이다. 기존 회계·법률·컨설팅 법인의 존재 이유가 흔들리게 됐다. 오픈AI는 인스타카트 최고경영자(CEO)를 영입해 기존의 커머스 시장과 광고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이들은 관련 스타트업 인수와 경험 있는 전문가 영입을 통해 각 산업 영역의 주도권을 빠르게 확보해가고 있다. 미국은 금융·법률·리테일·광고 등 자국 강점 서비스 산업을 기반으로 자율 에이전트 AI의 주도권도 빠르게 장악하고 있다. 기존 소프트웨어 기업들은 레거시를 버리지 못하는 '기득권의 딜레마'로 이 흐름을 주도하기 어렵다.
그러나 미국이 모든 시장을 가져갈 수는 없다. 미중 패권 경쟁의 결과로 반도체·조선·제련·중공업·원자력 등 전통 제조업에서 한국은 거의 유일한 대안이다. 아무리 뛰어난 AI 파운데이션 모델도 각 산업과 개별 기업에 깊이 축적된 숨겨진 노하우, 즉 현장 특화 지식에는 접근할 수 없다. 이 영역이 바로 한국의 기회다. 이 산업의 고도화를 팔란티어 같은 외부 기업에 내줄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산업 노하우를 지키는 신뢰 기반의 산업용 AI 전문 기업을 키워야 한다. 팔란티어와 미국 정부의 관계, TSMC와 반도체 설계 생태계의 관계처럼, 신뢰와 신뢰의 주체인 리더십이 새로운 AI 생태계의 근간이다.
역사에서 전례 없는 규모와 스피드의 구조적 변화는 먼저 움직이는 자에게 기회를 주지만, 주저하는 자에게는 돌이키기 어려운 위험으로 돌아왔다. 기존 교육 체계로는 이 속도전이 요구하는 인재를 길러낼 수 없다. 가장 효과적인 재교육은 강의실이 아닌 현장에 있다. 대학의 우수 인재들이 산업 현장과 스타트업에서 실전을 경험하고, 그 경험이 다시 대학으로 환류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의 산학연이 뜻을 모으고, 정부가 과감한 실험을 뒷받침할 여건과 재정적 쿠션을 마련해야 할 때다.
차상균 스탠퍼드대 HAI 석학 펠로우, 서울대 명예교수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