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세대를 대상으로 한 금융범죄가 급증했다. [사진=픽사베이]
“엄마, 나 핸드폰 액정이 깨졌어. 급하게 수리비 좀 보내줘.”
평소와 다름없는 딸의 목소리였다. 말투도, 억양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70대 최 모 씨는 일말의 의심 없이 2000만 원을 송금했다. 하지만 이는 딸이 아닌, 인공지능(AI)이 1분 남짓한 목소리 샘플로 만들어낸 ‘딥보이스’였다. 한평생 자식 뒷바라지하며 아낀 노후 자금이 단 몇 분의 통화로 허공에 사라졌다.
바야흐로 ‘AI 사기’의 시대다. 인공지능 기술이 범죄자의 손에 들어가면서,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시니어 계층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단순한 목소리 변조를 넘어 영상까지 조작하는 딥페이크 기술은 노인들의 판단력을 마비시키는 치명적인 무기가 됐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딜로이트가 최근 발간한 보고서는 인류가 마주한 ‘AI 금융 사기’의 경고장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내 생성형 AI로 인한 사기 손실 규모는 2023년 123억 달러에서 2027년 400억 달러까지 폭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딥페이크 관련 손실은 연평균 32%씩 늘어날 전망이다.
범죄 수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정교해지고 있다. 과거의 어설픈 말투는 사라졌다. 이제 AI는 단 30초의 음성 데이터만으로도 말투와 억양을 완벽하게 복제한다. SNS나 유튜브에 공개된 자녀의 짧은 영상이 범죄의 소스가 된다.
딥보이스 기반 피싱 범죄는 불과 반년 만에 5배가 급증하며 전 세계 금융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2021년 아랍에미리트에서는 대기업 임원의 음성을 사칭해 420억 원을 가로챈 사건이 발생했고, 캐나다에서도 아들 목소리를 흉내 낸 전화에 노인이 속아 거액을 송금하는 등 피해는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최근 금융 사기에 따른 금전적 피해가 심각하다. [사진=픽사베이]
더 큰 문제는 피해의 중심축이 고령층으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60대 이상의 전화금융사기 피해 건수는 2016년 1261건에서 2025년 5801건으로 4.6배 폭증했다. 금융감독원 조사에서도 2023년 보이스피싱 피해액 중 50대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65.4%에 달했다. 1인당 피해액 역시 전년 대비 51%나 급증한 1710만 원을 기록했다.
왜 시니어일까. 전문가들은 ‘정보 격차’와 ‘심리적 취약성’을 꼽는다. 디지털 문해력이 낮은 시니어들은 딥페이크나 딥보이스라는 개념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경찰입니다. 계좌가 범죄에 연루됐습니다”라는 위협이나 “아빠, 나 사고 났어”라는 호소에 가슴부터 뛰는 것이 노인들의 인지적 특성이다. 범죄자들은 이 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대출 빙자형 사기보다 기관 사칭 및 가족 사칭형 사기가 늘어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IT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시니어는 이 흐름에서 가장 취약한 고리다. 유튜브나 SNS에 음성이나 영상이 공개된 순간 누구나 표적이 될 수 있는데, 정보 접근성이 낮은 노인일수록 범죄 수법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금융권과 빅테크 기업들도 ‘AI 방패’를 마련하며 반격에 나섰다. 마스터카드는 1조 개 이상의 데이터를 분석해 거래 정확도를 예측하는 ‘디시전 인텔리전스’ 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국내에서도 삼성전자, SKT, KT 등이 AI 실시간 통화 분석 기능을 선보였다. 통화 중 ‘검찰 사칭’이나 ‘입금 요구’ 같은 키워드가 감지되면 화면에 즉각 경고 알림을 띄우는 식이다.
특히 개인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데이터를 외부 서버로 보내지 않고 기기 자체에서 분석하는 ‘온디바이스 AI’ 기술이 각광받고 있다. 경찰청이 보유한 실제 범죄자 목소리 데이터를 학습한 AI가 실시간으로 피싱 여부를 판단해 주는 서비스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적인 방어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사기범들은 늘 기술의 맹점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결국 가장 강력한 보안은 시니어 스스로의 ‘인식 변화’다.
SK텔레콤이 에이닷 전화에 보이스피싱 의심 통화를 탐지하면 위험 상황을 알리는 가족 케어 기능을 선보였다. [사진 = SK텔레콤]
특히 교육이 중요하다. 전문가들은 1회성 교육을 넘어, 실시간으로 사기 사례를 공유하고 디지털 기기 활용법을 익힐 수 있는 상설 교육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금융사의 역할도 단순한 앱 개발을 넘어선 ‘시니어 맞춤형 서비스’로 확장돼야 한다. 특히 시니어 전용 상담 채널 확대, 고액 인출 시 가족 알림 서비스 등 고령층의 눈높이에 맞춘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결합’이 시급하다.
AI 시대의 금융 사기는 기술의 옷을 입었지만, 본질은 인간의 감정을 이용하는 ‘심리전’이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무기로 삼는 이 비열한 범죄를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기술이 아닌 ‘가족 간의 소통’이다.
“모르는 번호로 온 자녀의 목소리도 일단 의심하고 끊은 뒤 본인에게 다시 확인하라”는 수칙은 차갑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늘날 시니어가 노후 자산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익혀야 할 생존법이 됐다. AI 사기의 범람은 우리 사회의 ‘신뢰 자본’을 봉쇄하고 있다.
이제 국가와 금융권, 그리고 가족이 함께 이 보이지 않는 위협에 맞서 거대한 방어망을 짜야 할 때다. [시사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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