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안보, 국가 생존 문제
'모든 것의 전기화' 추진하되
단기적 '유연 대응' 정책 필요
이재명 대통령이 3월 26일 한국석유공사 충남 서산 비축기지에서 석유화학기업 간담회를 마친 뒤 원유탱크를 살펴보며 관계자에게 질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란 전쟁은 에너지 안보가 국가 생존의 문제임을 확인시켰다. 평시에는 가격과 효율이 우선인 듯 보이지만, 위기 국면에서는 공급선의 안정성, 비축 여력, 대체 가능성이 훨씬 더 중요해진다. 에너지 대부분을 해외에 의존하는 한국에는 더욱 무거운 경고다. 이제 에너지 정책은 단기 대응, 중기 대비, 장기 전환을 하나의 시간표 안에서 다시 짜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시장 신호를 분명히 해야 한다. 연료 가격이 오르는데도 이를 일괄적으로 눌러버리면 소비 절감 유인이 사라지고 수급 불안은 더 길어진다. 위기 시기에는 가격 신호를 통해 불필요한 화석연료 소비를 줄이되, 운송업과 물류업처럼 연료 사용을 피할 수 없는 필수 업종에는 별도의 보조를 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모두에게 같은 방식으로 지원하면 재정 부담은 커지고 절감 효과는 약해진다. 줄일 수 있는 곳은 줄이게 하고, 반드시 써야 하는 곳은 버틸 수 있게 해야 한다. 위기 대응은 넓고 얕은 지원이 아니라, 선택과 집중이 분명한 정책이어야 한다.
중기적으로는 화석연료 조달과 비축 정책을 새로 짜야 한다. 우리 에너지 공급에서 화석연료 비중은 여전히 절대적이다.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공급망 관리와 비축 전략을 과거 방식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해외 자원 개발과 생산 자산 지분 확보, 국내 유망 광구 개발은 꾸준히 이어가야 한다. 이런 사업은 개발 기간이 길고 지정학적 위험도 커 민간에만 맡기기 어렵다. 정부가 세제 혜택을 제공하고 공기업을 통해 지속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축도 마찬가지다. 공익적 필요는 크지만 민간이 선뜻 감당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비축 설비 구축과 운영 비용을 제도적으로 회수할 수 있도록 지원하거나, 더 나아가 한국을 동북아 에너지 비축·거래 허브로 키우는 구상도 필요하다.
장기적으로는 결국 '모든 것의 전기화'를 흔들림 없이 밀고 가야 한다. 전기는 석유, 가스, 원자력, 재생에너지 등 다양한 발전원으로 생산할 수 있어 특정 연료의 공급 차질에 상대적으로 강하다. 같은 일을 하는데 필요한 에너지 양은 대체로 더 적다. 앞으로 인공지능(AI) 확산과 산업 구조 변화로 전력 수요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발전 설비를 확충하고 산업과 수송 등 전기의 활용 분야를 넓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한 전원만 밀어주는 방식이 아니라, 여러 발전원과 에너지 저장장치가 경쟁하면서 더 낮은 비용과 더 높은 효율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전력을 생산하는 발전기와 남는 전기를 저장했다가 필요한 시간에 공급하는 저장장치가 함께 시장에서 경쟁하면, 더 싸고 유연한 기술이 살아남게 된다. 이는 새로운 설비 투자와 운영 방식의 혁신을 촉진하고, 전력 공급의 안정성도 높인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더 합리적 전기요금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전기화는 단지 탄소 감축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고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정책이 설계되어야 한다.
이 세 정책이 따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단기에는 절감과 보호, 중기에는 조달과 비축, 장기에는 전기화와 기술 혁신을 일관된 전략으로 묶어야 한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임시 처방만 반복해서는 같은 불안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이란 전쟁이 던진 경고는 분명하다. 한국의 에너지 정책도 가격, 공급망, 기술 전환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법적·제도적 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다음 위기에서 덜 흔들릴 수 있다.
권효재 COR Energy Insight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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