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
漢詩
)
의 대표적인 형식은 칠언율시
(
七言律詩
)
이다
.
일곱 글자로 이루어진 구
(
句
)
가 아래로 여덟 개 이어진다
.
그래서
7
자
8
구로 전체
56
자로 구성된다
.
구가 네 개면 절구
(
絶句
)
라고 한다
.
칠언율시의 기본적인 규율은 평측
(
平仄
)
과 운법
(
韻法
)
이다
.
평측과 운법은 성조
(
聲調
)
에 관한 규율이다
.
중국말에는 네 가지 성조가 있다
.
평성
(
平聲
),
상성
(
上聲
),
거성
(
去聲
),
입성
(
入聲
)
이다
.
평성 이외의 상성
,
거성
,
입성을 측성
(
仄聲
)
이라고 한다
.
그리고 중국말은 한자
(
漢字
)
로 표기하니 한자에도 당연히 있다
.
성조란 말의 리듬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래서 시를 읊을 때의 리듬감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
칠언율시에서 평측이란
56
글자의 성조 배치 규율이다
.
첫 구의 두 번째 글자
(
제
2
자
)
가 평성이냐 측성이냐에 따라 시 전체의 평측 배열이 결정되는데
,
제
2
자가 평성으로 시작하면 평기식
(
平起式
)
이고 측성으로 시작하면 측기식
(
仄起式
)
이다
.
운법이란 기본적으로
8
구 중에서
2, 4, 6, 8
의 짝수 구 끝 글자에 평성이면서 동일한 운목
(
韻目
)
에 속하는 한자를 넣는 규칙이다
.
보통은 첫 구도 그렇게 한다
.
1)
평성의 운목은
30
가지가 있는데 상평성
(
上平聲
, 15
목
)
과 하평성
(
下平聲
, 15
목
)
이다
.
이 때 운을 맞추는 것을 압운
(
押韻
)
이라 하는데 운자
(
韻字
)
로 같은 글자를 중복해서 쓸 수는 없다
.
그리고 시 전체를 보아도 같은 글자를 여러 번 쓰는 것은
,
의도적인 강조가 아니라면 피해야 한다
.
평측을 맞추는 다른 규칙으로 대법
(
對法
)
와 점법
(
粘法
)
이 있다
.
대법이란 같은 연
(
聯
)
에서 윗구와 아랫구의 제
2
자의 평측이 반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
점법이란 이전 연의 아랫구와 다음 연의 윗구는 제
2
자의 평측이 같아야 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대법과 점법에 따른 평기식의 제
2
자 평측배열은
‘
평
-
측
-
측
-
평
-
평
-
측
-
측
-
평
’
이 되고
,
측기식이면
‘
측
-
평
-
평
-
측
-
측
-
평
-
평
-
측
’
이 된다
.
56
자 평측의 배치에서
,
각 구의 제
1, 3, 5
자는 원칙적으로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일삼오불론
(
一三五不論
)
이나
,
예외적으로 고조
(
孤祚
)
나 하삼련
(
下三連
)
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리듬을 해치게 되므로 반드시 평측을 조정하여 이를 피해야 한다
.
또 제
2
자
,
제
4
자
,
제
6
자의 평측은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 이사육분명
(
二四六分明
)
이다
.
대장
(
對仗
)
은 시를 구성하는 형식과 내용에 관한 것이다
.
율시
(
律詩
)
의 구성은 두 구씩 짝으로 수
(
首
),
함
(
頷
),
경
(
頸
),
미
(
尾
)
의
4
연
(
聯
)
이다
.
이것은 내용의 전개에서 기
(
起
),
승
(
承
),
전
(
轉
),
결
(
結
)
의 구조가 된다
.
이때 함연
(
頷聯
)
에서
3
구과
4
구
,
경련
(
頸聯
)
에서
5
구과
6
구은 반드시 대구
(
對句
)
를 이루어야 하는데
,
글자 수와 뜻
,
그리고 품사
(
品詞
)
를 위 아래로 맞추어야 한다
.
이것이 대장이다
.
칠언율시의 규율은 이처럼 체계적이면서 엄격하다
.
2)
과체시
율격
(
律格
)
에 맞춰 한시를 짓는 일은 고난도의 기예
(
技藝
)
이다
.
시를 짓는 일은 선비의 필수적인 덕목 중 하나였지만
,
선비라고 해서 누구나 자유자재로 한시를 지었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은 한시의 형식으로 된 소논문 같은 형태였다
.
그리고 과거시험 만의 형식 규율이 있었다
.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그것을 시라는 형식에 넣은 솜씨를 평가했다
.
과거시험에서 쓰는 장시
(
長詩
)
를 과체시
(
科體詩
)
라고 했다
.
김삿갓
(
金笠
)
김병연
(
金炳淵
)
은 과체시의 대가였다
.
그가 전국
8
도를 유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던 가장 큰 무기는 이 과체시였다
.
그는 과체시의 외판원이고 가정교사이면서 대리시험자였다
.
과거를 보려는 사람들에게 그의 과체시는 모범담안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
그는
20
세기 초에도 전국적인 유명인이었다
.
『
김립시집
』
3)
을 최초로 정리한 이응수
4)
가 김삿갓의 시를 더 발굴하기 위해 전국의 서당을 찾아다녔는데
,
그가 방문한 곳마다 김삿갓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
그리고 서당에서 만나는 이마다 김삿갓의 시를 몇 편씩은 암송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
김삿갓
김립이 삿갓 쓴 자신의 삶을 읊은 시가 있다
.
칠언율시
「
영립
(
詠笠
)
」
이다
.
詠笠
金笠
浮浮我笠等虛舟 一着四十信泛流
牧竪着驅身輕懶 漁翁戴伴傍沙洲
醉來掛壁觀花謝 興至登樓玩月收
俗子衣冠皆外飾 滿天風雨獨無愁
평수운
(
平水韻
)
5)
하평성
(
下平聲
)
우운
(
尤韻
)
으로 수구압운하였다
.
운자는
舟
(
주
),
流
(
류
),
洲
(
주
),
收
(
수
),
愁
(
수
)
이다
. 1
구 제
2
자가 평성이므로 평기식이다
.
함련은 신분과 상황을 대조하면서
牧竪
와
漁翁
이 명사
,
着驅
와
戴伴
은 동사구
,
身輕懶
와
傍沙洲
는 상태와 장소를 묘사하고 있다
.
경련은 취기와 흥취가 대조를 이루면서
醉來
와
興至
는 상태
,
掛壁
과
登樓
는 동사와 장소
,
觀花謝
와
玩月收
는 동사와 목적어의 구성이다
.
형식에서 정통적인 엄격한 규율을 지키면서 내용은 매우 자유로운 유랑 정신을 담았다
.
내가 김립의 시 한 편을 분석해 본 것은 무언가 꼬투리를 잡아 보려는 뜻이 아니다
.
오히려 반대다
.
그가 얼마나 형식에 충실한 시를 썼는지 보이고 알리려는 것이다
.
그는 한시의 대가였고 천재였다
.
조선시대 최고의 문사였다는 평가는 지극히 당연하다
.
흔히 그를 연상할 때
‘
파격
’
을 말하는데
,
그건 그의 시에서 아주 일부분이다
.
그리고 파격을 행할 조건과 장소에 맞추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
그렇게 할 수 있는 임기응변의 순발력이야말로 천재만이 부릴 수 있는 술법
(
術法
)
일 것이다
.
나는 김립의 시를 우리말로
7
자
8
행으로 짝수 행
(
行
)
에 운
(
韻
)
을 넣어 번안
(
飜案
)
해 보았다
.
삿갓
蝸牛
내삿갓빈배삼아 사십년쓰고다녀
소모는아인목에 어부는갈매기여
취하면걸고꽃봐 흥나면달에비춰
의관은겉치렌걸 비바람별탈없어
삿갓
“
삿갓 밑에서 살아도 속이 편해야 산다
.”
는 속담이 있다
.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도 속 썩이는 것만 없으면 살만하다는 뜻이다
.
다른 것으로는
“
삿갓 쓰고 어스름 달밤에 나선다
.”
가 있다
.
엉뚱한 짓을 한다는 의미다
.
6)
김립에게 삿갓은 세상을 유람한 동반자 빈배
(
虛舟
)
였다
.
金炳淵
김립 김병연
(1807-1863)
은
19
세기 인물이다
.
동 시대에 그를 기록한 사람이 셋 있다
.
신석우
,
황오
,
이우준이다
.
신석우
7)
와 황오
8)
는 김립을 직접 만났지만 이우준
9)
은 전해 들은 것을 기록했다
.
그런데
“
김병연은 대나무로 만든 삿갓을 쓰고 다녔다
”
고
,
삿갓 쓰고 시를 쓰며 방랑했던 사람이 김병연이라고 실명을 기록한 것은 오히려 이우준이다
.
10)
그래서 그의 기록이 상대적으로 중요하다
.
11)
역사적으로 김병연과 김립을 직접적으로 연결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
출판되지 않은 개인문집을 대중은 알 수도 볼 수도 없다
.
신석우의
《
해장집
》
과 황오의
《
녹차집
》
은 일제강점기에 알려졌지만
, 1852
년경에 성립한 것으로 추정하는 이우준의
《
몽유야담
》
은 그렇지 않았다
.
12)
이 외에도 김립에 대해 기록한 자료는
《
청구야담
》
,
장지연의
《
대동시선
》
(1918),
강효석의
《
대동기문
》
(1926),
현상윤의
「
홍경래전
」
(1930)
등이 있다
.
김병연의 생애를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이응수이다
.
바로 그가
1939
년에 학예사를 통해 발간한
『
김립시집
』
에 넣은
「
김립약보
」
이다
.
천도교 계통 잡지인
『
개벽
』
의 주필이었던 차상찬
13)
은 잡지에 광고를 내고 김삿갓의 유고를 모집했다
.
14)
그리고 주로
『
개벽
』
과
『
별건곤
』
을 통해서 김삿갓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썼다
.
그 뒤를 이어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다니던 이응수가 다양한 매체에 글을 써서 실었다
.
15)
이를 통해서
1920~30
년대에 일제강점기 지식인들 사이에서 김삿갓 붐이 일어났다
.
이응수는 김병연의 손자인 김영진
(
金榮鎭
)
을 직접 만났다
.
이응수가
「
김립약보
」
에 넣은 김병연 일가의 주거지 이동과 차남인 익균
(
翼均
)
이 아버지를 찾아다닌 이야기
,
그리고 화순 동복
(
同福
)
에서 김삿갓이 생을 마친 것
,
익균이 뒤늦게 의풍
16)
의 태백산록에 이장한 사연 등은 김영진의 진술에 의존했을 것이다
.
김병연의 아들 김익균은 영월을 떠나 평창의 천동리에서 훈장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
그곳 도마치에 그의 묘가 있다
.
익균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택진
(
澤鎭
)
과 영진이다
.
큰아들인 택진은 나무를 해다 팔며 어렵게 동생에게 글을 가르쳤다
.
영진은 어린 시절에 강원도 고성에 있는 건봉사
(
乾鳳寺
)
로 출가했다
.
그러다 왕궁의 나인들이 자주 찾는 서울의 절로 옮겼다
.
궁중나인들이 그를 고종에게 천거하여 처음에 궁내부
(
宮內府
)
주사
(
主事
)
가 되었다
.
그리고 별군
(
別軍
)
과 시종
(
侍從
)
을 거쳐 홍천군수
(
洪川郡守
)
가 된다
.
이응수가 김영진을 만난 때는
,
김영진이 군수에서 물러난 후 경기도 여주 이포리에서 양조장을 하면서 큰돈을 벌었고
,
말년에 석문사
(
石門寺
)
란 절을 지었을 무렵이다
.
17)
이강재
/
임상
8
체질연구회
각주
1) 수구압운(首句押韻)이라고 한다.
2) 위 〈한시의 율격〉에 관한 내용은 지난 두 달간 혼자 공부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자료를 찾고 개념을 잡는 데 AI의 도움이 컸다.
3) 이응수, 『김립시집』 학예사 1939
4) 李應洙(1904-1964)
5) 평수운(平水韻)은 중국 남송 시대에 정리된 한시의 압운 기준이 되는 106개의 운목(韻目) 체계를 말한다.
6) 정종진, 『한국의 속담 대사전』 태학사 2006. 10. 30. p.1125
7) 申錫愚(1805-1865)
8) 黃五(1816-?)
9) 李遇駿(1801-1867)
10) 《夢遊野談》의 「古今詩話」 條目
金炳淵者不知何許人也 或戴笹笠或着蔽陽子 或鮮明衣履而或弊垢懸鶉 嗜酒飮廢口不替 去就無常閃忽莫測 但不欺其姓名而已 所到以文章見廟 呼韻使賦應口輒對 亦多神語 至於科體行詩 綺速無瑕 或有人評論其疵病 則便張目叱之曰 長者之文安敢妄論 聞其名者不見之數 笑而受之 常止於止處 或浹旬或彌朔 忽又捨去無定住焉
11) 홍성남, 「김병연 소고」 『한국어문학연구』 〈제39집〉 동악어문학회 2002. 8.
12) 《몽유야담》이 학계에 알려진 것은 1974년과 1979년이다.
13) 車相瓚(1887-1946)
14) 『개벽』 〈제43호〉 1924. 1.
“해동의 기인 김립의 유고를 모집한다.”
15) 전국 각지에서 우편으로 그에게 김삿갓 시가 배송되었다. 이응수는 특별히 김삿갓의 직계종손인 여주의 김홍한(金洪漢), 경성의 오한근(吳漢根), 부산의 장민언(張玟彦)을 특정하여 감사를 표시했다.
16)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 경북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가 서로 만난다. 와석리와 의풍리 사이에 ‘박영국이 김삿갓 묘소를 발견했다고 주장한’ 노루목 고개가 있다. 와석리에 사는 아이들은 의풍리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닌다.
17) 박영국, 『김삿갓의 유산』 영월군 1992. 6. 5.(재판)
저작권자 © 민족의학신문
이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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