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며] 한현우 보건학 박사·전 이화여자대학교 외래교수
오늘날 글로벌 보건의료 환경은 과거의 ‘보편적·표준적 치료’에서 개인의 특성을 세밀하게 고려한 ‘맞춤형 정밀 의료(Precision Medicine)’로 그 패러다임이 급격히 전환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생명공학기술(BT)과 정보통신기술(IT)의 혁신적 결합이 자리 잡고 있다.
이제 의료 서비스는 단순히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대면 진료와 처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개인의 유전체 정보부터 생활 습관, 식이 요인, 환경적 변수 등 방대한 데이터를 통합 분석하여 질병을 사전에 예측하고 개인에게 최적화된 치료 모델을 제공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보건의료 정보 인프라와 디지털 기술력을 갖추고 있어, 이러한 의료 혁신을 선도할 최적의 조건을 이미 확보하고 있다.
암은 의학 기술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류가 정복해야 할 가장 거대한 과제 중 하나다. 최근 암 관리 정책의 핵심은 여기저기 분산된 의료 데이터를 어떻게 ‘가치 있는 자원’으로 전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국가 단위의 우수한 임상 데이터를 다량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료기관별로 데이터 형식이 상이하거나 표준화가 미비하여 이를 통합적으로 활용하는 데 상당한 제약이 따랐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사업이 바로 ‘암 데이터의 연구 자원화’다. 이는 병원 내에 잠들어 있는 진료 정보, 영상 정보, 유전체 정보 등을 표준화하여 하나의 거대한 공유 플랫폼에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연구자들은 고품질의 암 중점 데이터를 안전하고 투명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되며, 이는 곧 혁신적인 암 치료법 및 신약 개발과 직결되는 핵심 자산이 된다.
△데이터 통합을 향한 글로벌 동향
의료 데이터의 통합과 개방은 이미 전 세계적인 흐름이자 국가 경쟁력의 척도가 되었다. 선진국들은 국가 차원에서 암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정밀 의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먼저 미국은 질병예방 및 통제센터(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CDC)산하 NPCR(National Program for Cancer Registry)과 국립암연구소(NCI)의 SEER 프로그램을 통해 방대한 암 등록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으며 이를 정밀하게 분석하여 암 예방 및 관리에 활용하고 있다.
영국 또한 COSD(Cancer Outcomes and Service Dataset)를 운영하여 국가 암 데이터셋을 통합하고 연구자들에게 개방함으로써 임상 연구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웃 나라 일본도 국립암센터 산하의 암관리·정보서비스 센터를 통해 암 레지스트리(registry)를 운영하며 환자의 기초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해 정책 수립의 과학적 근거로 삼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데이터가 단순한 기록물이 아니라, 국가 보건 역량을 결정짓는 ‘전략적 자산’임을 보여주고 있다.
△법적·제도적 기반과 기대효과
우리나라 역시 이러한 글로벌 흐름에 발맞추어 선제적인 법적·제도적 기틀을 마련했다. 암관리법 제9조(암데이터사업) 및 제18조(국가암데이터센터)를 근거로, 보건복지부는 효율적인 데이터 관리를 위해 전문기관을 국가암데이터센터로 지정하였다. 이는 개인정보 보호법의 엄격한 틀 안에서 데이터를 안전하게 가공하고 분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함이다.
암 데이터 자원화가 본격화되면 우리 사회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측면의 획기적인 변화가 기대된다.
첫째, 정밀 의료 및 맞춤형 의료 지원의 실현이다. 임상 데이터와 유전체 데이터의 유기적 연계를 통해 환자 개개인에게 부작용은 적고 효과는 극대화된 최적의 치료법을 제시할 수 있다.
둘째, 보건 의료 정책의 과학적 고도화다. 암 관리의 주요 지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정확하게 예측함으로써 근거 중심의 보건 정책을 수립하고, 국가 의료 재정의 합리적 운영을 도모할 수 있다.
셋째, 신산업 생태계의 조성이다. 구축된 암 빅데이터를 민간에 안전하게 개방함으로써 AI 기반의 암 진단·예측 소프트웨어 개발 등 보건의료 분야의 신산업 기술 및 서비스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 넷째, 국민의 정보 접근성과 의료 서비스 질 향상이다. 표준화된 메타데이터와 가이드라인을 공개하여 연구 문턱을 낮춤으로써, 국민들에게 고품질 의료 서비스의 형태로 돌아가게 된다.
필자는 과거 공직에서 질병관리 현장을 지키며 데이터의 정확성과 체계적인 관리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실감한 바 있다. 암 데이터의 연구 자원화는 단순한 기술적 과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보건 복지 수준을 근본적으로 한 단계 격상시키는 ‘국가적 대도약 프로젝트’다. 파편화되어 흩어져 있는 데이터를 하나로 모으고, 이를 지혜롭게 활용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암 정복이라는 인류의 오랜 꿈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의료계의 헌신적 협력, 그리고 투명한 데이터 거버넌스가 조화를 이룰 때 대한민국은 글로벌 정밀 의료의 허브로 거듭날 수 있다. 데이터가 곧 생명이 되는 시대, 우리의 준비된 대응이 수많은 환자와 가족들에게 희망의 이정표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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