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 연대로 : 전라도 혐오에 맞서는 사람들 ①이대학보
‘오래된 혐오의 재활용’ 통해 청년층에 만연한 현상 고발
알보칠·포도 등 일상적 단어 변질…“혐오의 무게 가벼워
“방관 말고 혐오를 부끄러워하는 사회적 인식 전환 필요
이대학보가 9월 7일자로 보도한 ‘오래된 혐오의 재활용’ 지면.
“대학생이 되고 서울와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데, 한 학생이 고향을 듣고는 ‘라도는 좀…’이라고 표현해 주변에서 깔깔거리고 웃더라구요. 지금은 너무 많이 접해 무력감 때문인 지,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정도가 됐죠.”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신문인 ‘이대학보’ 나혜인 기자의 말이다. 2024년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 기자는 서울로 진학하면서 숱한 차별을 직접 겪었다고 했다. 나 기자가 포함된 이대학보 취재팀은 지난 9월 7일 기획 취재로 ‘오래된 혐오의 재활용: 편견은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가’를 게재했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만연한 호남 혐오(전라도 혐오)의 실태를 고발하고, 호남 혐오가 생산·소비되는 과정을 추적한 기사다. 수도권의 대학 언론사가 자칫 특정 지역의 문제로 치부되기 쉬운 호남 혐오의 실상을 대학생의 시각에서 정면으로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일상에서의 경험은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결정적인 도화선이 됐다. 이대학보 임채리(취재미디어부장)·한재유(취재3부장)·나혜인(사진부장)기자로 꾸려진 취재팀은 ‘전라도 혐오’의 심각성을 탐사보도해 온 무등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같이 설명했다. 임채리 기자는 “최근 스타벅스 탱크데이 사건이나 배재고 호남 혐오 응원 사건을 접하며 맥락과 관계없이 호남 혐오가 소비되는 것을 보고 심각성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면서 “호남 혐오는 결코 호남 지역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실제 최근 제주도에서 여성 실종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제주도를 향한 무차별적 혐오가 심해졌는데, 작동 기제가 호남 혐오와 매우 유사하다”고 꼬집었다.
호남을 싸잡아 비난하는 사례도 경험했다. 나 기자는 “강원도·경상도에서 택시를 탔을 때, 고향을 묻는 기사에게 ‘전라도 광주’라고 했더니, 분위기가 안 좋아지면서 ‘전라도 사람들은 문제다. 자기 회사 선배가 전라도였는데 이기적’이라며 호남 전체를 일반화해 욕을 했다”며 “서울에 오면 사투리를 애써 고치려 하지 않는 경상도와 달리, 호남 출신 고향 친구들은 부정적인 이미지나 인식 탓에 고향을 숨기고 싶어 조급하게 사투리를 고치려 애쓴다”고 했다.
혐오 표현들이 일상적으로 사용되면서 전라도와 전라도 출신에 대한 편견이 스며들고 점차 굳어진다는 점도 문제다. 한재유 기자는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미디어에서 호남 혐오성이 짙은 게시물이나 농담에 혐오 표현인 줄도 모른 채 ‘좋아요’를 누르는 대학생들을 많이 보았다”며 “혐오인 줄도 모르는 상황이 쌓이면서 혐오가 더욱 가벼워지고, 무의식적으로 편견과 안 좋은 인식이 생기게 된다”고 말했다.
현상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고 교묘했다. 임 기자는 “전라도 혐오가 과거 정치적 영향에 머물렀던 것과 달리, 최근에는 혐오 표현과 밈이 결합하면서 퍼지는 속도가 매우 빨라졌고, 그로 인해 혐오의 무게가 훨씬 가벼워졌다”고 짚었다. 당사자성이 약해진 상태에서 죄책감이 없다보니, 거리낌 없이 행해지고 있다는 거다. 특히 일상적인 단어가 전라도 혐오 표현과 결합되고 있는 현상은 우려를 더했다. 임 기자는 “알보칠(알고 보면 일곱시·호남 지역을 뜻하는 표현)이나 포도(5·18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칭하는 은어)와 같은 아주 일상적인 단어들이 호남 혐오 의미를 짙게 담은 은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며 “왜 그런 표현을 쓰냐고 하면 ‘나는 그런 의미로 쓴 것이 아니다’라며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놀이가 됐다”고 비판했다.
취재팀은 혐오 행위를 부끄럽게 여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한 기자는 “장난으로 던진 말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는 당사자성이 있는 폭력으로 다가갈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며 “추상적인 공감성 회복을 넘어 실질적으로 서로의 상처를 인지하게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혐오 표현이 있으면 따끔하게 뭐라고 하고, 이런 행동이 부끄러운 것이라는 인식 전환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 기자 또한 “언제든 자신 또한 다른 종류의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필요하다”며 “혐오에 대한 인식 개선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꾸준히 계속 시도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물리적 폭력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임 기자는 “여성을 향한 혐오 표현이 심해지면서 실제 범죄로 이어진 것처럼, 호남 혐오도 더 커다란 물리적 폭력 사건을 야기 할 수 있어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며 “어디까지를 혐오 표현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 때문에 형사처벌 목적의 법 제정은 신중할 수밖에 없지만, 최소한의 자제력을 줄 수 있는 제도적 선언과 법적 장치가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기자들은 공감과 공존을 주문했다. “기사가 널리 읽히지 않더라도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관련 부처 공무원이나 피해를 겪는 당사자 단 한두 명에게라도 닿아 영향력과 위로를 줄 수 있다면 그 가치는 충분합니다.”
이삼섭기자 seob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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