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이슈] 제약·바이오 글로벌 톱50 노리는 유한양행
유일한 정신 받들어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하고 신약으로도 대성공
R&D 성과 재투자하는 선순환 구조 확립… ‘포스트 렉라자’ 개발 속도
6월 창립 100주년을 맞은 유한양행은 ‘매출 1위 제약사’에서 신약 개발 명가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사진은 서울 동작구 유한양행 본사. [사진 유한양행]
한국 제약·바이오 산업을 대표하는 유한양행이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기업이 얻은 이익은 다시 사회로 환원돼야 한다’는 창업자 고(故) 유일한 박사의 철학은 유한양행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 가치로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유한양행은 창업 초기부터 국내 기업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투명한 지배구조를 바탕으로 사회적 책임의 기틀을 마련했다.
유 박사는 1936년 한국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해 기업 성장의 결실을 구성원과 공유했다. 1969년에는 자녀에게 경영권을 승계하지 않는 전문경영인 체제를 확립해 소유와 경영을 엄격히 분리했다. 이는 당시 국내 가족 경영 관행을 정면으로 돌파한 최초의 지배구조 혁신으로 평가된다. 유 박사는 특히 1971년 서거 당시 “모든 개인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파격적 유언을 남긴다.
100년 기업 유한양행은 유 박사의 유언을 기반으로 설립한 유한재단과 유한학원을 통해 기업 이윤이 사회로 되돌아가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한양행은 신약 전문 기업으로도 두각을 보이고 있다. 유망 신약 후보물질(파이프라인)을 기술 도입한 뒤 자체 개발하는 방식의 오픈 이노베이션 전략을 통해서다. 유한양행은 미국 식품의약국(FDA) 문턱을 넘은 첫 국산 항암제 ‘렉라자’ 성공 스토리를 이을 혁신 신약을 개발해 세계 50대 제약·바이오 기업으로 도약한다는 목표다.
민족의 아픔 치유하려 세운 ‘유한’
온 국민이 나라를 잃고 어두웠던 시절, 한 청년 사업가가 고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식품회사를 세워 크게 성공했던 유일한 박사였다. 그는 편안한 삶을 뒤로하고 굳이 메마른 조선 땅에 제약회사를 세웠다. 유한양행이 만들어진 밑바탕에는 “건강한 국민만이 잃었던 조국을 되찾을 수 있다”는 유 박사의 간절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당시 한국 사람들은 전염병과 영양 부족으로 고통받으면서도 일본 기업이 파는 비싼 약을 구하지 못해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았다. 이 모습을 본 유 박사는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라며 약을 만드는 일로 나라에 보답하기로 마음먹었다. 1926년 6월 서울 종로에서 유한양행이 첫발을 내디딘 이유다.
유한양행이 세워진 배경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사업 차원이 아닌,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과도 깊게 맞닿아 있었다. 유 박사는 아홉 살 되던 1904년 순회공사 박장현을 따라 미국 네브래스카주로 건너가 침례교 신자였던 두 자매의 집에 맡겨졌다. 14세가 되던 해에는 당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박용만 선생이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에 다니며 조국 수호 의지를 다졌다. 16세 고등학생 시절 본명인 유일형 대신 유일한(韓)이 한국인이라는 뜻에 더 맞는다고 생각해 개명한 일화도 유명하다.
이처럼 유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며 타향에서 겪은 수많은 경험은 그의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애국심을 심어줬다. 그는 고통받는 민족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성장의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그의 고뇌는 1919년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 자리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이 자리에서 “우리 민족이 독립하려면 스스로 설 수 있는 경제적 힘과 교육, 그리고 건강한 몸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민족의 자강을 위한 그의 치열한 고민이 훗날 유한양행 설립의 굳건한 토대가 된 것이다.
유한양행이라는 이름에도 창립자의 정체성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이 녹아 있다. 유 박사 자신의 성씨인 ‘버들 유(柳)’와 나라 이름인 ‘한국(韓)’을 합쳐, ‘한국인 유일한이 세운 서양 물건(약)을 파는 가게’라는 의미를 담았다. 단순히 약을 파는 곳을 넘어 세계 속의 한국 기업으로서 자부심을 키우려는 의지를 담은 이름이었다. ‘양행(洋行)’이라는 표현을 선택한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행은 본래 ‘서양으로 향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는 단순히 국내 시장에 안주하지 않고 해외의 좋은 물건을 국내로 들여오는 것은 물론 국내 물건을 해외로 보내겠다는 포부가 담겼다. 사명을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나아가겠다는 선구적 비전을 분명히 한 셈이다.
유한양행을 상징하는 버드나무 그림에도 특별한 사연이 있다. ‘버들표’는 독립운동가 서재필 박사와의 인연에서 시작됐다. 필라델피아 대회 의장이던 서재필 박사와 유 박사는 자주 교류하며 조언을 구했다. 유 박사가 1926년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 서 박사를 찾아가 고국에 회사를 세울 계획을 말하자, 서 박사는 조각가였던 딸에게 특별히 부탁해 ‘버들표 목각품’을 정표로 선물했다. “버드나무는 꺾여도 다시 자라며 메마른 땅에서도 깊게 뿌리를 내리는 끈질긴 나무다. 이 나무처럼 우리 민족에게 시원한 그늘을 주고 희망을 주는 기업이 되어라”는 뜻이었다. 유 박사는 이 버드나무 그림을 회사의 상징으로 삼고, 평생을 ‘민족의 쉼터’ 같은 회사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유일한 박사는 약을 만드는 일로 나라에 보답하기 위해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는 1971년 서거 당시 “모든 개인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유언장을 남겼다. [사진 유한양행]
‘1위 제약사’에서 신약 명가로…
창립과 함께 일간지 등에 실린 유한양행의 개업 광고는 나열식 제품 설명에서 벗어나 커다란 버드나무 상징을 전면에 배치한 파격적 마케팅을 선보인 것으로 회자된다. 당시 광고들이 상세한 문구로 효능을 과장했던 것과 달리, 유한양행은 서재필 박사가 기증한 버들표 로고를 강조하며 민족의 안식처가 되겠다는 기업 정체성을 각인시키는 데 주력했다. 당시 불투명했던 의약품 유통 관행을 타파하고자 한 시도도 눈에 띈다. 광고에 성분 공개와 정찰제를 명시함으로써 모조품이 범람하던 시장에서 차별화를 꾀했다. 유한양행은 유 박사의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단숨에 ‘정직’과 ‘신뢰’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유 박사는 회사를 세운 초기, 일본산 약품보다 질이 좋고 품종이 다양한 미국산 약품을 수입·판매했다. 이후 의약품 국산화에도 성공하게 된다. 1933년 자체 개발한 1호 의약품 안티푸라민을 출시하면서다. 안티푸라민은 소아과 의사였던 유 박사의 부인 호미리 여사의 의학적 조언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안티푸라민은 9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국민 브랜드로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한, 유한양행이 글로벌 신약 개발 중심 기업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혁신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100년 전 창업자의 신념에서 출발한 유한양행은 이제 신약을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보이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유한양행의 신약 개발 성과 중심에는 ‘렉라자(성분명 레이저티닙)’가 있다.
국산 신약 제31호인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렉라자는 국산 항암제 최초로 존슨앤드존슨(J&J)의 ‘리브리반트(성분명 아미반타맙)’와의 병용요법으로, FDA 승인을 받으며 글로벌 시장에 본격 진출했다. 이후 유럽, 일본, 중국 등 주요 시장에서 잇따라 허가를 획득했다.
렉라자는 올해 리브리반트의 투약 편의성 개선을 계기로 글로벌 시장 확대에 더욱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기존 정맥주사(IV)는 투약 시간이 수시간에 달해 환자 부담이 컸던 반면, 지난해 FDA가 승인한 피하주사(SC) 제형은 투약 시간이 단 5분에 불과하다. 주입 관련 부작용 발생률도 66%에서 13%로 크게 줄었다. 여기에 지난 2월 월 1회 투약 요법까지 허가되면서 병용요법 채택률 상승이 예상된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렉라자가 각국에 진출하면서 유한양행이 받게 되는 기술료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유한양행은 2018년 J&J 자회사 얀센 바이오테크에 ‘레이저티닙(렉라자)’ 글로벌 개발·판매에 대한 권리(한국 제외)를 기술 수출했다. 유한양행은 지난 5월 14일 “얀센 바이오테크로부터 레이저티닙의 유럽 상업화 개시에 따른 단계별 마일스톤 3000만 달러(약 449억원)를 60일 안에 수령할 예정”이라고 공시했다. 이에 따라 레이저티닙 누적 마일스톤은 총 3억 달러로 늘었다. 유한양행 관계자는 “글로벌 매출의 10% 이상을 로열티로 수령하고 있는 만큼, 라이선스 수익 면에서 큰 폭의 성장이 기대된다”고 했다.
유한양행은 렉라자의 성공을 발판 삼아, 차세대 성장 동력을 발굴하는 데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유한양행이 공을 들이고 있는 첫째 주자는 만성 자발성 두드러기(CSU) 등 알레르기 질환 치료용 파이프라인 ‘레시게르셉트(개발 코드명 YH35324)’다.
레시게르셉트는 CSU 환자 대상 임상 1상에서 대조약 ‘졸레어(성분명 오말리주맙)’ 대비 우수한 효과를 보이며 잠재력을 입증했다는 게 유한양행의 설명이다. 지난해 국내 2상 시험계획(IND) 승인을 받은 데 이어 최근 한국을 비롯해 일본, 중국, 불가리아, 폴란드 등에서 CSU 환자 150명을 대상으로 한 다국가 임상 2상에 돌입했다.
유한양행 관계자는 “레시게르셉트 또는 위약을 12주간 투여한 뒤 안전성과 유효성을 평가하는 방식으로, 기존 치료법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보지 못한 오말리주맙 ‘불응 환자’ 등을 포함해 보다 구체적으로 임상적 차별성을 검증할 계획”이라며 “임상 2상에서 의미 있는 데이터를 확보해 추가 적응증 확장 및 후속 글로벌 개발 전략을 구체화할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희귀질환 분야 파이프라인 ‘YH35995’도 ‘포스트 렉라자’로 기대를 모은다. 유한양행은 YH35995를 고셔병 치료제로 개발하고 있다.
국산 신약 제31호인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렉라자’는 국산 항암제 최초로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았다. [사진 유한양행]
‘레시게르셉트’ 등 후속 개발 순항
고셔병은 ‘GBA1’ 유전자 변이로 인해 세포 내 리소좀 효소(글루코세레브로시다아제) 기능이 저하되면서 글루코실세라마이드(GL1)가 체내 여러 장기에 축적되는 희귀 유전질환이다. 특히, 신경병증성 고셔병(2형·3형)은 중추신경계(CNS) 증상이 동반되지만, 기존 치료제는 혈액뇌장벽(BBB)을 충분히 통과하지 못하는 약점을 지녔다. 유한양행 관계자는 “YH35995는 약물이 BBB를 통과하도록 설계한 것이 가장 큰 차별점”이라면서 “신경학적 증상이 나타나는 고셔병 2형·3형 환자에게 새로운 치료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유한양행은 이와 관련해 2024년 임상 1상 IND 승인을 받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전임상에서는 혈장과 뇌에서 GL1을 유의하게 감소시키는 한편, 행동 이상 개선과 함께 뇌 조직에서 글리아세포를 활성화하는 등 신경 염증 관련 지표의 증가를 억제하는 효과를 확인했다.
유한양행 관계자는 “건강한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한 임상 1상 단회 투여 결과, 양호한 안전성 프로파일을 보였다”며 “결과를 바탕으로 4주 간격 반복 투여에 따른 안전성 및 내약성, 혈장 및 뇌척수액(CSF)에서의 GL1 변화, CNS 내 표적 결합 여부 등을 확인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유한양행은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 2조1866억원, 영업이익 1044억원을 각각 기록했다. 매출은 전년 대비 5.8%, 영업이익은 90.2% 증가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이 회사는 지난해 전체 매출의 11.1%인 2424억원을 R&D 부문에 투자했다.
최은석 월간중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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