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기사나 인터뷰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선의의 경쟁’이다. 주전 자리를 놓고 다투는 선수들에게도, 태극마크를 놓고 맞붙는 선수들에게도, 우승을 겨루는 라이벌들에게도, 학교 운동회에서도 으레 ‘선의의 경쟁을 펼친다’는 문구가 따라붙는다. 좋은 말 같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함정이 있다.
‘선의의’라는 표현이 자주 쓰이는 또 다른 문구는 ‘선의의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기본적으로 나쁜 행동으로 인식되지만 상대를 배려하거나 보호하기 위한 거짓말에는 ‘선의’라는 말을 붙여 예외를 인정한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표현에는 거짓말이 원칙적으로 부정적인 행동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선의의 경쟁’도 마찬가지다. ‘선의’를 경쟁 앞에 붙이는 순간, 경쟁도 자칫하면 좋지 않은 행위가 되며 좋은 의도를 가진 경쟁만 긍정적이라는 뉘앙스가 생긴다.
우리는 대입 수험생들을 향해 ‘선의의 경쟁을 벌인다’고 말하지 않는다. 공무원 시험도, 각종 국가자격시험, 기업 입사시험에서도 ‘선의의 경쟁’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음악, 미술 대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선의’라는 포장에 갇힌 스포츠계
사고·민원 피하려 경쟁 위축시켜
특혜 없이 실력 겨루고 인정하는
진정한 경쟁 알려주는 교육 필요
그런데 스포츠에서는 경쟁 앞에 ‘선의’를 유독 자주 덧붙인다. 이런 표현이 반복될수록 스포츠에서 경쟁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상대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수준을 확인할 수 있고, 더 나은 결과를 위해 노력하게 만드는 것이 경쟁의 본질이다. 경쟁을 나쁜 것으로 규정한 뒤 ‘선의’라는 포장지를 씌워 좋은 것으로 만들 필요도 없고 거기에 현혹돼서도 안 된다. 규칙을 지키고, 특혜 없이 겨루며, 패자는 결과를 받아들이는 게 모든 분야에서 똑같이 적용되는 경쟁의 개념이다.
경쟁이라는 단어에는 몇몇 전제가 내포돼 있다. 똑같은 목표, 목표에 도전하는 두 개 이상 이해 당사자, 동등한 환경이다. 동등한 환경은 동등한 인원, 동등한 자격, 동등한 규칙 등이다. 즉 경쟁 안에는 동등함, 공정함이 포함돼 있다. 공정함, 동등함이 빠지면, 그 분야가 어디든, 그건 경쟁이 아니라 싸움이며 전쟁이다. 스포츠가 싸움, 전쟁과 다른 이유는 페어플레이, 스포츠맨십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우리는 모두 따라야 하는 규칙에서, 스포츠가 존재하려면 상대가 있어야 하며 그래서 상대를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배운다. 성적, 메달은 경쟁을 통해 얻는 정당한 결과물이지, 싸움과 투쟁, 전쟁을 통해 얻는 전리품이 아니다.
‘선의의 경쟁’이라는 말에 담긴 선의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선의의 경쟁’을 강조하는 이면에는 ‘정정당당함의 결여’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은폐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걸 지적할 뿐이다. 우리가 스포츠를 포함해 모든 분야에서 불공정함을 몰아내야 함은 물론이다. 동시에 소위 ‘선의의 경쟁을 위해’라는 명분으로 스포츠에서 경쟁 자체를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
요즘 학교 운동회, 체육대회에서는 종목 경쟁으로 벌어진 점수 차이를 ‘응원 점수’와 ‘질서 점수’로 메워 의도적으로 무승부를 만든다. “아이가 지고 돌아와 속상해한다. 패배감을 주지 말라”는 학부모 민원도 있다. 처음부터 승패를 가리지 않거나 최종 결과를 무승부로 처리하는 학교도 있다. 이런 학교가 내린 결론도 단순하다. 승패만, 경쟁만 없애면 사고도, 민원도, 갈등도 없다는 것이다.
운동회가 반드시 승패를 가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참여하는 축제형 운동회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교육적 판단에 따라 경쟁을 줄이는 것과 민원을 피하려 실제 경기 결과를 무승부로 바꾸는 것은 다르다. 아이들은 경쟁을 통해 이기는 법만을 배우지 않는다. 규칙을 지키고, 자신보다 잘하는 친구를 인정하고, 패배한 뒤 다시 도전하는 법도 익힌다. 자존감은 늘 이기게 해준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졌지만 재기하는 경험에서도 자란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하게 도전하고, 규칙을 지키면서 기량을 겨루며,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는 학교다. 경쟁은 죄가 아니다. 경쟁을 투쟁, 전쟁과 같은 개념으로 착각하면서 그걸 없애는 게 최선이라고 사람들이 믿도록 과정과 결과를 ‘조작’하는 게 잘못이다.
김세훈 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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