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균 주필
'야누스의 두 얼굴'은 로마 신화의 두 얼굴을 가진 신 야누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야누스는 본래 지혜와 통찰의 상징이었다.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하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인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이익에 따라 신념을 바꾸는 사람을 가리키는 부정적 표현이 됐다. 이중적 태도, 이중적 인격을 뜻하는 '위선'의 대명사가 됐다. 안타깝게도 이 표현만큼 오늘날 정치권을 정확히 설명하는 말도 드물다.
국민을 설득해야 할 정치는 원칙보다 진영이 먼저다. 상식보다 이해관계가 앞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같은 사안을 두고도 내 편이 하면 개혁, 상대편이 하면 독선이라고 한다. 내가 하면 관행, 남이 하면 적폐로 단정한다.
법치와 공정을 외치던 사람도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되면 정치 탄압을 주장한다. 야당일 때는 정치보복이라고 주장하던 세력이 집권하면 법치의 엄정함을 강조한다. 반대로 여당 시절에 검찰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던 정치인들이 야당이 되면 정치 탄압을 외친다. 법치의 기준이 아닌, 권력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인데도 말이다.
인사 검증도 다르지 않다. 야당 시절에는 작은 도덕성 논란에도 “결격사유” “자격이 없다”고 맹공을 퍼붓다가, 정권을 잡으면 “능력이 더 중요하다”며 감싸기에 급급하다. 반대편 인사에게 적용했던 잣대가 내 편 앞에서는 느슨해진다.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는 흠결 자체보다 기준이 달라지는 데 있다.
반대로 여당에서 야당으로 처지가 바뀌면 논리는 다시 뒤집힌다. 기준은 그대로여야 하는데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정치의 '이중잣대'인 셈이다. 정치는 원래 '타협의 예술'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원칙까지 타협해서는 안 된다.
국회 역시 협치보다 정쟁의 무대가 된 지 오래다. 필리버스터와 상임위원회 운영, 특검법과 각종 법안 처리 과정에서도 원칙보다 유불리가 앞선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국민은 같은 사안에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지를 눈여겨 지켜보고 있다.
정치가 신뢰를 잃는 이유는 실수가 잦아서라기보다, 실수에 대한 기준을 사람마다 달리 적용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상대에게 적용한 원칙을 자신에게도 적용하는 용기다. 그것이 법치이고, 공정이며, 책임이다.
정치가 야누스의 원래 의미를 되찾으려면 두 개의 얼굴이 아니라 하나의 원칙을 가져야 한다. 권력이 바뀌어도 '원칙'은 변치 않는 정치, 사람이 아니라 '기준'이 중심이 되는 정치이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가 아닌, 하나의 얼굴로도 당당한 사람들이다.
/김명균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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