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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시론] 호르무즈 이후의 에너지 전략

특히 반도체, 데이터센터, 배터리와 같은 전력다소비 산업 비중이 높은 한국 경제에서는 전력 안정성이 곧... 데이터센터, 반도체, 배터리와 같은 핵심 산업은 전력 인프라 위에서만 작동한다. 에너지 정책은 더 이상 산업...

[시론] 호르무즈 이후의 에너지 전략

‘슈퍼 트릴레마’ 시대, 한국이 선택해야 할 것

유상희 플랜텍 상임감사(前 전력거래소 이사장)

유상희 플랜텍 상임감사(前 전력거래소 이사장)

[이투뉴스/유상희] 호르무즈 해협이 흔들리자 시장이 즉각 반응했다. 유가는 치솟고, LNG가격은 출렁였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본질은 가격이 아니다. 더 위험한 것은, 우리가 의존해 온 에너지 질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금 세계는 ‘저렴하고 안정적인 에너지’라는 전제를 잃고 있다. 이 변화는 일시적 충격이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구조적 전환이다.

이제 에너지는 단순한 연료가 아니다. 국가의 생존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이자, 산업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 인프라다. 우리는 오랫동안 에너지 문제를 ‘트릴레마’로 이해해 왔다. 안정성, 경제성, 환경성. 세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키기 어렵다는 전제였다. 그러나 이 균형은 이미 무너졌다. 전쟁은 공급을 흔들고, AI는 전력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며, 탈탄소 규제는 무역의 장벽으로 작동하고, 에너지 비용은 구조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이제 에너지 문제는 세 가지 변수의 균형이 아니다. 지정학, 전력 수요, 탄소 규제, 비용이 동시에 충돌하는 ‘슈퍼 트릴레마’의 시대다. 문제는 이 구조가 한국에 가장 불리하게 작동한다는 점이다. 에너지는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산업은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하며, 수출은 탄소 규제에 직접 노출돼 있다. 특히 반도체, 데이터센터, 배터리와 같은 전력다소비 산업 비중이 높은 한국 경제에서는 전력 안정성이 곧 국가 경쟁력이다. 이 구조에서는 단 한 축만 흔들려도 산업 전체가 흔들린다.

이제 질문은 달라져야 한다. 어디서 더 싸게, 더 많은 에너지를 확보할 것인가가 아니라, 이 충돌하는 조건 속에서도 에너지 공급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는가다. 특히 AI 시대에 필요한 전력은 더 안정적으로, 더 밀도 높게, 그리고 단 한 순간의 중단 없이 공급돼야 한다. 이 조건이 무너지면 데이터센터는 멈추고, 공장은 서며, 경제는 즉각 타격을 받는다.

문제는 분명하다. 재생에너지 단독으로는 이 요구를 감당할 수 없다. 간헐성이라는 구조적 한계 때문이다. 따라서 해법은 특정 에너지원의 확대가 아니다. 에너지 시스템 전체를 다시 설계하는 것이다. 핵심은 세 가지 축의 결합이다. 재생에너지는 탈탄소와 자립성을 담당하고, 원자력은 안정적인 기저전력을 제공하며, 저장장치와 전력망은 이를 연결하고 조정한다. 이 세 축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될 때만 에너지안보와 산업 경쟁력은 동시에 확보될 수 있다.

이를 가능케하려면 다음과 같은 네가지가 필수적이다. 첫째, 전력망과 저장 인프라에 대한 선제적 투자다. 재생에너지를 늘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조정할 수 있는 계통과 저장 능력이다. 전력망 확충이 지연되는 순간, 산업 성장은 그 자리에서 멈춘다.

둘째, 원자력을 포함한 현실적인 에너지 믹스 전략이 필요하다. 이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 안정성의 문제다. 기저전력 없이 넷제로를 논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셋째, 산업 정책과 에너지 정책의 통합이다. 데이터센터, 반도체, 배터리와 같은 핵심 산업은 전력 인프라 위에서만 작동한다. 에너지 정책은 더 이상 산업 정책의 하위 영역이 아니라, 그 기반이 되어야 한다. 넷째, 에너지 수입선 다변화에 머무르는 접근을 넘어야 한다. 에너지 수입선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국내에서 생산하고 통제할 수 있는 에너지 비중을 높이는 구조적 전환이 병행돼야 한다.

이번 호르무즈 사태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문제는 특정 지역의 리스크가 아니다. 가격의 변동도 아니다. 우리가 여전히 해외 에너지에 깊이 의존하고 있다는 점, 그 구조 자체가 위험의 본질이다. 따라서 에너지 안보의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 에너지를 얼마나 싸게 들여오는가가 아니라, 외부 충격에도 시스템이 흔들리지 않도록 설계돼 있는가가 핵심이다.

이 지점에서 넷제로의 의미도 다시 정의돼야 한다. 넷제로는 단순한 환경 정책이나 탄소 감축의 개념이 아니다. 넷제로는 에너지 시스템을 재설계하는 산업 전략이며, 국가 생존을 위한 인프라 전략이다. 그리고 그 설계안에서 피할 수 없는 선택이 있다. 원자력이다.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고, AI 시대의 고밀도 전력을 감당하며,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기저전력. 이 축이 빠진 시스템은 완성될 수 없다.

에너지 전략은 더 이상 비용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 생존과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구조의 문제다. 해외 화석연료에 의존해 온 기존 방식은 지정학적 리스크와 가격 변동 앞에서 이미 한계를 들어냈다. 이번 호르무즈의 위기는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완전한 에너지 자립은 어렵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립의 여부가 아니라 우리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의존도를 줄이는 것이다. 원자력, 재생에너지, 전력망, 저장기술 등 우리의 첨단 기술들을 종합하여 외부리스크에 덜 흔들리는 에너지 공급시스템으로 신속히 전환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적인 에너지 안보이며 넷제로가 향하는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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