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국가재정 좀먹는 '좀비사업'
2026.06.25 17:47
2026.06.26 00:05
지면
A35
기사 스크랩
Google 검색에서 한국경제 기사를 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은 대안 있어도 관성적 유지
성과 낮다면 과감히 정리해야
정도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최근 한국은행은 의미 있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경쟁력이 낮은 ‘좀비기업’의 25%만 시장에서 퇴출돼도 우리 경제의 총요소생산성(TFP)은 0.2%, 부가가치는 0.35% 높아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좀비기업 비중이 높을수록 정상기업의 투자와 고용은 위축된다. 핵심은 기업의 생존 여부가 아니다. 자본과 인력이 가장 생산적인 곳으로 배분되지 못하는 자원 배분의 실패다.
그렇다면 국가재정은 어떤가. 중앙투자심사위원으로 수많은 공공투자사업을 심사하면서 필자가 가장 자주 던진 질문은 “이 사업이 필요한가”가 아니라 “정말 이 방법밖에 없는가”였다. 한 지방자치단체는 학생들의 생존수영 교육을 위해 새로운 공공수영장을 건립하려고 했다. 생존수영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이 지역은 학생이 많지 않았고 인근에는 운영 중인 수영장이 있었다. 기존 시설을 활용하거나 공동 이용하는 방안은 충분히 검토됐을까.
이 질문은 특정 사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책목표는 생존수영이었지만 투자 수단은 수영장이었다. 정책목표는 하나지만 이를 달성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그럼에도 정책목표가 정해지는 순간 특정 사업이 거의 유일한 해법처럼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정 규모의 예산이 확보되면 사업의 필요성을 다시 묻기보다 이미 구상된 사업을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되는 경향도 나타난다. 이는 특정 부처의 문제가 아니라 예산 편성과 심사 구조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기업에 좀비기업이 있다면 국가재정에도 일종의 ‘좀비사업’이 존재한다. 여기서 말하는 좀비사업이란 더 효과적인 대안이 있음에도 관성적으로 유지되는 투자 수단이다. 문제는 사업 자체가 아니라 미래 경쟁력을 높일 재원이 이런 투자 수단에 계속 묶여 있다는 점이다. 좀비기업이 생산성을 떨어뜨리듯 좀비사업 역시 국가 생산성을 낮출 수 있다.
이런 모습은 지역 소멸 대응과 AI 전환(AX)에서도 반복된다. 지역을 살리고 AI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목표는 옳다. 그러나 투자 수단은 새로운 건물과 시설을 만드는 방향으로 수렴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을 키우고 데이터를 축적하며 운영체계를 혁신하는 투자는 성과가 늦게 나타나고 측정도 어렵다. 이에 비해 건물과 시설은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남긴다. 그러나 건물은 준공되면 성과처럼 보일 뿐, 경쟁력은 결국 사람과 운영을 통해 만들어진다.
영국은 공공투자의 기준인 ‘그린북’을 통해 먼저 정책목표를 정의한 뒤 이를 달성할 다양한 대안을 비교한다. 새로운 시설 건립뿐 아니라 기존 시설 활용, 공동 이용, 민간 활용 등 가능한 투자 수단을 동일한 기준에서 평가한다. 사업보다 투자 수단을 먼저 경쟁시키는 구조다.
경제안보 시대에는 예산심사도 달라져야 한다. 일정 규모 이상의 재정사업은 다양한 투자 수단을 비교한 ‘대안 비교서’ 제출을 의무화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업뿐 아니라 투자 수단도 함께 경쟁시켜야 한다.
한국은행은 좀비기업의 25%만 정리해도 우리 경제의 생산성과 부가가치가 높아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국가재정도 같은 질문을 던질 때다. 성과가 낮은 좀비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그 재원을 미래 경쟁력을 높이는 분야로 재배분한다면 어떨까. 정부는 정책목표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투자 수단은 언제든지 더 나은 대안과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 경제안보 시대 국가의 경쟁력은 더 많은 예산이 아니라 더 나은 자원 재배분에서 나온다. 이제 예산도 사업을 유지하는 제도가 아니라 경쟁력을 설계하는 제도로 바뀌어야 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