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인프라 확충에 따른 메모리 수요 급증이 전방위적으로 확인되는 가운데,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등 핵심 장비를 독점 공급하는 ASML의 실적 호조는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대규모 설비 투자와 직결된다. 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향후 이익 가시성을 높이는 동시에, 국내 주식 시장 전반의 상승 동력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16일 블룸버그 통신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ASML의 1분기 실적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한국 시장의 매출 비중 급증이다. 1분기 한국 지역의 시스템 매출 비중은 직전 분기 22%에서 45%로 두 배 이상 증가하며 지역별 1위를 기록했다. 매출액 기준으로는 16억7000만 유로에서 28억4000만 유로로 크게 늘었다.
이러한 수치는 대만과 중국을 제치고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제조사들이 글로벌 장비 시장의 핵심 수요처로 부상했음을 보여준다. 전체 장비 매출 중 메모리 분야 비중이 절반을 상회했다는 사실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AI 사이클에 대응하기 위해 선단 공정 전환 및 생산 능력(Capa) 확장에 자본 지출(CapEx)을 집중하고 있음을 실증한다.
실제로 SK하이닉스는 2027년까지 EUV 장비 확보에 약 80억 달러를 투입하는 장기 계약을 체결한 바 있으며, 관련 업계 분석에 따르면 해당 물량의 상당 부분은 이미 발주가 완료된 상태로 파악된다.
전방 산업의 수요는 장비사의 실적 가이던스를 초과하는 수준으로 견조하다. 크리스토프 푸케 ASML 최고경영자(CEO)는 실적 발표를 통해 "고객사들의 2026년 메모리 생산 물량이 이미 완판됐으며, 공급 제약은 2026년 이후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수급 타이트 현상의 근본 원인은 알파벳, 오픈AI 등 빅테크 기업들의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에 있다. AI 연산 처리를 위해서는 고대역폭 메모리(HBM)와 고용량 서버용 D램이 필수적이다. 특히 HBM은 일반 D램 대비 웨이퍼 소모량이 크고 공정 난이도가 높아, 제조사들이 생산 능력을 최대로 가동하더라도 전체 메모리 시장의 공급량 증가는 제한적이다. 수요가 공급을 구조적으로 상회하는 현 시점의 수급 불균형은 제품 판가 인상으로 이어져 메모리 제조사의 마진 폭을 크게 확대하는 요인이 된다.
삼성전자 서초사옥, SK하이닉스. [출처=연합]
ASML 측의 공급 병목 현상이 해소된 점도 국내 기업들에게는 긍정적이다. 과거 팬데믹 및 공급망 교란 시기에 발생했던 장비 리드타임 지연 문제는 현재 부품 및 클린룸 부지 확보를 통해 정상화됐다. ASML은 올해 Low-NA EUV 장비를 최소 60대 생산하고, 2027년에는 80대 이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장비 반입의 가시성이 확보됨에 따라 한국 메모리 기업들의 증설 계획도 차질 없이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견조한 수요를 바탕으로 ASML은 2026년 연간 실적 가이던스를 기존 340억~390억 유로에서 360억~400억 유로로 상향 조정했다. 설치기반 매출의 증가와 고성능 E·F 모델 비중 확대에 따른 평균판매가격(ASP) 상승이 반영된 결과다.
'슈퍼 을'로 불리는 독점 장비 기업의 가이던스 상향은 장비를 인도받는 제조사들의 중장기 실적 호조를 담보하는 강력한 선행 지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반입된 첨단 장비를 바탕으로 HBM 및 선단 D램의 생산 수율을 높이고,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의 믹스 개선을 통해 높은 이익률을 방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국내 코스피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차지하는 시가총액 비중과 이익 기여도를 고려할 때, 두 기업의 확고한 실적 펀더멘털은 곧 전체 주식 시장의 하방 경직성을 확보하고 상단을 열어두는 핵심 동력이다.
불확실한 거시 경제 환경 속에서도 명확한 수요처와 공급 제약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맞물린 현재의 메모리 반도체 사이클은 국내 증시 전반의 상승세에 힘을 보탤 전망이다.
류형근 대신증권 연구원은 "시장이 초호황을 인지하고 있어 이익 전망 상향에 대한 민감도는 연초 대비 하락하고 있어 결국 단기 이익 상승의 기울기와 사이클의 지속력이 중요하다"며 "둔화에 대한 우려가 있지만 이익 성장의 기울기가 시장 예상 대비 가파를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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