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디지털 전환, 산업 구조의 재편이 가속화되는 오늘, 대학과 산업의 관계 또한 근본적인 재구성을 요구받고 있다. 이제 산학협력은 선택적 정책 과제가 아니라, 지역과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핵심 전략이 됐다. 이에 교수신문은 산학 분야의 다양한 전문가들과 함께 대전환 시대를 여는 릴레이 기고를 마련했다.
일곱 번째는 주충호 한국로봇산업진흥원 수석연구원이다. 휴머노이드 기술이 실생활 단계로 진입하면서 피지컬 AI가 제조 혁신의 핵심 기술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의 반도체·철강·조선 등 지역 주력산업에 축적된 숙련공의 암묵지는 휴머노이드 학습을 위한 핵심 데이터 자산이 될 수 있다. 지역별 인간-머신 동작 데이터센터와 휴머노이드 트레이닝 센터를 구축해 숙련 기술을 디지털화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학습된 로봇과 스마트공장 운영 체계를 패키지로 수출하면 새로운 제조 솔루션 산업이 형성될 수 있다. 싱가포르 글로벌 혁신센터와 메타 팩토리 모델은 이러한 제조 솔루션 수출 전략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피지컬 AI 시대에는 숙련 기술 디지털화 인력, 지역 연계 교육, 재직자 리스킬링을 통해 사람 중심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피지컬 AI 기반 휴머노이드 훈련 거점 구축해야
공장 기술 기록화, 차세대 자동화 핵심 자원으로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의 휴머노이드 로봇 스타트업 ‘피규어 AI’(Figure AI)가 공개한 가사 노동 영상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로봇이 사물을 인식하고 스스로 판단해 집안을 정리하는 모습은 휴머노이드 기술이 이미 실험실을 넘어 실생활의 문턱에 와 있음을 증명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 현대자동차가 전북 새만금 지역에 AI 데이터센터와 로봇 제조 클러스터 등 대규모 투자를 결정한 것은 매우 시의적절한 행보다. 글로벌 대기업들의 시선은 이제 ‘피지컬 AI’(Physical AI), 즉 물리적 신체를 지능적으로 제어하는 기술로 향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 10년간 한국로봇산업진흥원에서 ‘로봇활용 제조혁신 지원사업’과 ‘첨단제조로봇 실증사업’ 등 정부사업을 운영하며 수많은 현장을 누벼왔다. 그간 현장을 채웠던 단순 반복 작업용 제조로봇(다관절로봇 등)은 조만간 포화 상태로 흐를 것이다. 이제는 자동화가 불가능해 보였던 영역, 즉 인간의 정교한 손놀림과 유연한 판단이 필요한 공정에 투입될 차세대 솔루션이 필요하다. 그 해답이 바로 ‘피지컬 AI’를 탑재한 휴머노이드 로봇이다.
로봇 자동화 공정의 모습이다. 단순 반복 제조로봇이 포화 단계에 이르면서 정교한 손동작과 판단이 필요한 공정을 자동화할 대안으로 피지컬 AI 기반 휴머노이드가 차세대 솔루션으로 제시된다. 사진=연합뉴스
지역별 주력산업 ‘숙련 기술’ 핵심자산
우리나라는 지역별로 강력한 주력산업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다. 평택·이천의 반도체, 포항·광양의 철강, 창원의 방산, 울산의 자동차·조선, 사천의 항공우주가 그것이다. 이 거대한 생태계의 핵심 자산은 수십 년간 현장을 지켜온 숙련기술자들의 ‘암묵지’(Tacit Knowledge)이다.
지금까지 이 노하우는 전수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남겨져 왔다. 하지만 피지컬 AI 시대에는 이 숙련된 동작 데이터가 가장 값비싼 ‘연료’가 된다. 지역 현장의 고도화된 동작 데이터를 수집·정제해 휴머노이드에 학습시킨다면, 세계 최고 수준의 ‘K-로봇 숙련공’을 탄생시킬 수 있다.
이를 위해 필자는 지역별 ‘인간-머신 동작 데이터센터’(H-M Motion Data Center)와 ‘휴머노이드 트레이닝 센터’ 구축을 제안한다. 인간-머신 동작 데이터센터는 지역별 주력산업에 종사하는 숙련공들의 미세한 근육 움직임, 시선 처리, 작업 판단 로직을 디지털화하여 저장하는 거점이다. 휴머노이드 트레이닝 센터는 데이터센터에서 정제된 고급 데이터를 바탕으로 휴머노이드를 집중 교육하고 학습시키는 로봇 훈련소이다. 각 지역이 로봇을 단순히 사용하는 곳을 넘어, 로봇의 지능을 ‘생산’하고, ‘고도화’하는 기지로 탈바꿈해야 하기 때문이다. 창원에서는 용접과 가공을 잘하는 로봇이, 울산에서는 조립에 특화된 로봇이 훈련되는 방식이다.
스마트공장 시스템 패키징해 수출하는 모델
이 전략의 종착지는 로봇 단품 판매가 아니다. 숙련된 피지컬 AI가 탑재된 로봇과 이를 운영하는 스마트공장 시스템을 통째로 패키징하여 수출하는 모델이다. 이는 주력산업의 경쟁력을 유지함과 동시에 ‘로봇 서비스’(RaaS)라는 거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이다.
대표적 선행 모델이 바로 현대자동차 싱가포르 글로벌 혁신센터(HMGICS)다. HMGICS는 컨베이어 벨트 대신 독립된 ‘셀(Cell) 기반 제조’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AI 비전 기술을 가진 ‘스팟’(Spot)이 품질을 검사하는 등 공정의 70%를 자동화했다. 특히 가상 세계에 공장을 구현한 ‘메타 팩토리’를 통해 최적의 경로를 시뮬레이션하는 기술은 우리가 구축할 트레이닝 센터가 지향해야 할 정점이다. 이러한 플랫폼이 미국 조지아 신공장(HMGMA) 등에 성공적으로 이식된다면, 공장 운영 솔루션 수출의 문이 활짝 열릴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K-제조업의 정의를 바꾸는 일이며, 지역의 숙련된 기술이 로봇의 뇌에 이식되고, 그 로봇이 공장이라는 시스템과 함께 수출될 때, 우리 지역 경제는 전 세계 제조 현장에서 발생하는 ‘로봇 구독료’와 ‘솔루션 라이선스’를 거두어들이는 거대한 부의 원천이 될 것이다.
‘로봇-산업 융합형 인재’ 지역 연계 3대 전략
기술과 인프라만큼 중요한 것은 이를 운영할 사람이다. 필자는 피지컬 AI 시대를 이끌 ‘로봇-산업 융합형’ 인재 양성을 위해 세 가지 실행 전략을 제안한다. 첫째, ‘현장 숙련기술 디지털화 전문 엔지니어’ 양성이다. 단순히 코딩만 하는 개발자가 아니라, 지역 주력산업의 제조 공정을 깊이 이해하고 숙련공의 암묵지를 데이터화할 수 있는 ‘지식 중개자’가 필요하다.
둘째, ‘지역 밀착형 지산학(地産學) 순환 생태계’ 구축이다. 데이터센터를 지역 대학과 캠퍼스 혁신파크 내에 배치해 학생들이 실시간 데이터를 활용해 실습하고, 그 결과물을 지역 기업에 적용하는 ‘리빙랩’(Living Lab) 모델을 도입해야 한다.
셋째, 재직자 ‘리스킬링(Reskilling)’ 지원이다. 피지컬 AI는 노동력의 퇴출이 아닌 확장을 의미한다. 숙련공들이 로봇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로봇 트레이너로 전환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교육 지원 프로그램을 기존 사업과 연계하여 확대해야 한다.
결국 피지컬 AI를 통한 지역 부흥의 완성은 로봇이 사람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를 로봇을 통해 증폭시키는 것에 있다. 지역별 주력산업에 특화된 인재가 로봇의 지능을 만들고, 그 지능이 탑재된 로봇이 전 세계로 수출될 때 우리 청년들은 고향을 떠나지 않고도 글로벌 첨단 산업의 주역으로 성장할 수 있다.
지역 소멸의 위기는 사람과 일자리의 소멸에서 온다. 피지컬 AI와 휴머노이드는 우리 지역의 숙련 기술을 디지털 자산으로 영속시키는 가장 확실한 생존 전략이다. 대한민국이 지능형 제조 솔루션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이제 지역 현장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 때다.
주충호
한국로봇산업진흥원 수석연구원
주충호 한국로봇산업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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