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광 대구경북소비자연맹 정책실장
1979년 10월 26일 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교토대학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던 심상철 교수(현 경북대학교 응용화학부 명예교수)는 격변의 소식을 뉴스 통신을 통해 접했다. 사건 발생 다음 날인 27일, 심 교수는 아래층에 위치한 후쿠이 겐이치(福井謙一) 교수 연구실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를 맞이한 후쿠이 교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옷걸이에 걸려 있던 양복 저고리를 다시 꺼내 입었다. 이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귀국의 대통령 서거에 깊은 조의를 표한다”고 위로했다.
심 교수는 일본의 사무라이 집안 출신인 후쿠이 교수에게 한국의 양반 정신과 맞닿아 있는 선비적 품성을 느꼈다. 그러나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타국의 유학생이 겪을 충격을 온전히 헤아려준 그 교수의 태도 앞에서, 그 순간 깊은 울림과 함께 숙연함을 느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한국의 이론화학 분야에서 거목인 이태규 교수의 제자이기도 한 후쿠이 겐이치 교수는 이러한 품성과 깊은 학문적 역량을 바탕으로 198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한편, 국내의 억압적 정치 현실에 맞서던 이들에게 박 대통령의 죽음은 오랜 탄압을 끝낼 민주화의 신호탄이자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감으로 다가왔다.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 생존과 인권을 위협받으며 투쟁해야 했던 이들이 당시 느꼈던 복잡다단한 감정을, 격동의 시대를 비켜선 오늘의 잣대로 단순하게 재단하거나 폄훼할 수는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정권의 공과를 비판하는 일과 한 인물의 비극적 죽음을 마주하는 태도는 과연 같은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치열했던 정치적 투쟁의 정당성이라 할지라도 한 생명의 최후에 대한 도를 넘는 조롱이나 멸시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이 상반된 두 풍경 속에서 우리는 지성과 인간에 대한 세 가지 성찰을 이끌어낼 수 있다.
첫째, 죽음 앞에서의 보편적인 인간애다. 권력의 과오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비판은 냉정하게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정치적 평가와 고인의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도리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한 국가를 이끌었던 인물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는 사실 자체는 그가 누구였든 하나의 중대한 인간적 사건이다. 내가 동의하지 않았던 이의 비극적인 죽음 앞에서도 최소한의 인간적 예우를 지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품격이 드러난다.
둘째, 국경과 이념을 넘어선 지성적 공감이다. 후쿠이 교수가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고개를 숙였다는 사실은 단순한 의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한 나라의 정치적 사건을 넘어, 역사적 격변 속에서 한 인간이 겪는 충격과 슬픔을 헤아리는 태도였다. 학문이 깊어질수록 인간과 사회에 대한 시야도 넓어져야 한다는 오래된 믿음이 있다면, 이 일화는 그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진정한 지성은 자신이 속한 국가와 진영의 경계를 넘어 다른 인간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려는 데서 출발한다.
셋째, 정치적 승패의 논리를 넘어선 지성인의 품위이다. 치열한 정치적 투쟁의 현장에서는 상대의 패배가 곧 나의 승리로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정치적 승리의 감정과 한 생명의 최후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는 차원이 달라야 한다. 결국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정치적 승리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한 인간의 죽음을 조롱하거나 멸시해도 된다는 면죄부로 오용되는 태도다.
성숙한 민주사회는 승자의 환호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치적 승리 이후에도 패자의 존재와 인간적 존엄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회는 한 단계 더 도약한다. 자신이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의 비극 앞에서도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되, 생전의 과오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역사적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균형이야말로 진정 건강한 사회다.
정치가 아무리 치열하더라도 인간의 생명과 죽음까지 정파적 승패의 계산법으로 바라본다면, 결국 정치 자체가 인간을 압도하게 된다. 반대로 한 시대의 정치적 갈등을 넘어 그 시대를 살아간 인간의 운명과 역사적 비극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권력 투쟁의 차원을 넘어선 더 넓은 시야와 건강한 정치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979년 10월, 일본인 석학이 갖춰 입은 정장은 단순한 복장이 아니라 격변의 역사 앞에서도 타인의 아픔을 온전히 헤아린 진정한 지성인의 태도였다. 그의 고개 숙임은 특정 정치인을 향한 찬사가 아니라, 비극 앞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잃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존엄과 연민을 일깨우는 상징이었다. 정파적 이해와 갈등의 파고를 넘어, 죽음 앞에서조차 서로를 향한 인간적 예우를 거두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의 역사와 민주주의도 한 뼘 더 성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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