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국건 정치평론가
투표용지 부족에 따른 투표 중단이란 초유의 사태가 터졌는데, 중앙선관위의 대응은 안이한 수준을 넘어 국민 우롱처럼 느껴질 정도다. 가장 먼저 내놓은 대책이 외부 전문가들을 투입해 자체 진상조사단을 꾸린다는, 많이 듣던 말이다. 2022년 대선 때 발생한 소쿠리 투표, 2023년 고위 간부 자녀와 친인척의 부정 채용 논란이 생겼을 때 발표했던 대책의 재탕, 삼탕이다. 소쿠리 투표 때는 감사원의 직무감찰 협조 요청을 선관위가 거부하면서 자체 감사를 벌인다고 했으나 재발 방지를 담보할 결과물은 없었다.
채용 비리 의혹 때는 감사원이 감찰에 착수하자 선관위가 헌재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하면서 막았다. 당시 헌재는 선관위의 경우 행정 부서가 아닌 독립된 헌법기관이란 이유로 인용 결정을 내렸다. 감사원은 감사원법상 감사 배제 대상에 선관위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반발했으나 소용없었다. 당시 선관위는 감사원 감사를 받는 대신 외부 인사들로 구성된 감사위원회를 설치했으나 감사 결과는 비공개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이번 투표 중단 사태 조사도 이대로 두면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다.
선관위는 대국민 사과와 사태 경위를 설명하면서 노태악 중앙선관위원장과 허철훈 사무총장이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2022년 소쿠리 투표 때 노정희 중앙선관위원장이 선거사무는 위원장이 아닌 사무총장 소관이라며 44일 동안 버티다 물러난 일과 대비돼 ‘결단’처럼 보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노 위원장은 투표 중단 사태가 없었어도 이번 선거를 끝으로 물러날 사람이었다. 중앙선관위원장은 9명 선관위원 중 현직 대법관이 통상적으로 맡는데, 노 위원장의 대법관 임기는 3월3일 만료됐다. 이에 조희대 대법원장이 천대엽 대법관을 후임으로 내정했으나 민주당의 반발로 임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지방선거 때까지 노 위원장이 직무를 계속하도록 조치했으므로 퇴임이 예정돼 있었는데 마치 ‘용퇴’를 하는 것처럼 포장됐다.
선관위의 경위 설명을 들으면서 경악할 사실도 알았다. 중앙선관위의 지침에 따라 각 지역선관위는 이번에 관할 구역 내 선거인 수의 50% 정도에 해당하는 본투표 용지만 찍었다고 한다. 이번 선거 기준 투표율 23.51%를 기록한 사전 투표는 용지가 별도로 자동 출력되니 사전·본투표 합해서 대략 75% 정도의 투표율을 최대치로 잡고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다면 75% 투표율이 선관위가 목표하는 최대치인가. 그 투표율을 절대 넘지 않을 것이란 전제하에 본투표 용지를 찍었다는 말인가. 선거철마다 국민 참정권 행사를 위한 투표 독려 이벤트를 벌이는 선관위가 유권자 75%만 사용할 수 있는 용지를 확보해 왔다는 건 충격이다. 이렇게 준비해 놓고 겉으론 모두 와서 투표하라고 외치는 건 위선이며 유권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우리나라 선거 관리 체계를 확 뜯어고치자는 주장이 나온 지 오래됐다. 선관위가 감사원 등 외부 통제를 전혀 받지 않는 사이에 현대판 음서제가 판을 친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선거사무도 차질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이번엔 실책 차원을 넘어 선관위의 존재 이유마저 흔드는 사안들이 연일 발견되고 있다. 오죽하면 여야 모두 국정조사나 특검이 필요하다고 모처럼 입을 맞췄을까. 선관위 내부를 모조리 들여다보는 수사, 조사가 불가피해졌다.
그런 기회가 생기면 일각에서 꾸준히 제기하나 한쪽에선 ‘음모론’으로 치부하는 부정 선거 논란도 끝을 봐야 한다. 사전 투표 등에서 부정이 있었다, 없었다 전제하지 말고 진상을 규명해서 국민이 받아들일 결론을 내놓으면 소모적 논쟁이 종식될 수 있다. 위기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송국건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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