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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소버린 AI의 역설, 자립은 불가능하다…공급망·인재가 핵심

가령 싱가포르는 인프라 경쟁 대신 디지털 신원과 데이터 거버넌스, 금융·물류 특화 AI에 집중하고 있고, 이스라엘은 군·연구·스타트업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특정 분야에 집중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이런 사례는...

소버린 AI의 역설, 자립은 불가능하다…공급망·인재가 핵심

반도체 강국의 장점 살리고 인프라를 넘어야

연결된 생태계 속 선택과 조합이 경쟁력 좌우

“소버린 AI, 모두가 원하지만, 누구도 완전히 가질 수는 없다.” 최근 <MIT 테크놀로지 리뷰>(2026년 1월 25일)는 캐시 리(Cathy Li, 세계경제포럼 산하 AI 우수 센터의 책임자)의 글을 소개하며 ‘소버린 AI’에 대해 냉철한 진단을 내렸다. 각국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으며 자국 중심 AI 인프라와 모델을 구축하려 각축전을 벌이고 있지만, 글로벌 공급망과 인재 이동으로 얽혀 있는 AI 생태계를 고려하면 완전한 자립이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 제기를 자의적 진단이나 과잉 경고라고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자타공인 AI 1위인 미국조차 완전한 소버린 AI 국가라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가령 AI 연산의 핵심인 GPU만 하더라도 반도체 설계는 엔비디아가 하지만 제조는 대만 TSMC가 맡고 있고, 핵심부품 고대역폭 메모리(HBM)는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이 공급한다. 또한 엔비디아 CEO는 대만 출신,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 CEO는 인도 출신이다. 실리콘밸리의 AI 경쟁력을 떠받치는 고급 연구자와 개발자 다수는 인도, 아시아, 유럽 등에서 유입되고 있다. 이는 AI 경쟁력이 국적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가치사슬 체계와 인재 이동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소버린 AI 논의는 여전히 ‘얼마나 큰 데이터 센터를 지었나’, ‘어느 정도 연산 능력을 확보했나’ 등으로 축소된다. 인프라 중심의 AI 전략은 한계가 있다. 대형 데이터 센터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고 전력망, 냉각수, 환경 규제 등 새로운 병목 현상을 수반한다. 실제 글로벌 데이터 센터의 상당수는 전력 인프라 문제로 차질을 빚고 있다. 더 결정적 변수는 인재 문제다. AI 연구자나 창업가는 혁신적 환경, 자본 접근성, 연구개발 자율성 등을 좇아 이동한다. 최신 GPU 등 첨단 인프라만으로는 인재를 유치하거나 붙잡아 둘 수 없다.

지난해 10월 30일 코엑스에서열린 엔비디아의 그래픽카드(GPU) 지포스 기념 행사에 참석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다. 소버린 AI는 자립이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과 인재를 활용한 전략적 설계와 실제 문제 해결 능력으로 완성된다. 사진=연합뉴스

협력 구조 설계하는 전략적 상호의존성

캐시 리는 소버린 AI는 자급자족이 아니라, 글로벌 AI 생태계에서 어떤 영역은 자립하고 어떤 영역은 협력할지 선택하는 전략적 상호의존성(strategic interdependence)의 문제라 정의한다. 소버린 AI의 핵심은 고립이 아니라, 협력 구조를 설계하고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가령 싱가포르는 인프라 경쟁 대신 디지털 신원과 데이터 거버넌스, 금융·물류 특화 AI에 집중하고 있고, 이스라엘은 군·연구·스타트업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특정 분야에 집중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이런 사례는 현실적인 AI 전략이다. 그들은 실리콘밸리를 복제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잘하는 영역을 정의하고 그 안에서 국제적 역할을 설계하는 실용주의를 택했다.

반도체와 AI 패권 경쟁이 치열한 현실에서 한국이 처한 객관적 상황은 녹록지 않다. 반도체 제조 역량과 디지털 인프라, 높은 기술적 수용성은 갖고 있지만, 동시에 △저출산·고령화 △지방소멸 △지역 격차 △양극화 등 성장의 걸림돌이 될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부는 ‘AI 3대 강국(G3)’을 목표로 대규모 예산 투자와 연구개발, 제도 정비를 추진 중이고, 2024년에는 AI 기본법 제정으로 안전·신뢰·혁신을 지향하는 거버넌스도 마련했다.

또한 이재명 정부가 표방하는 ‘AI 기본사회’ 구상은 AI가 단순한 생산성 도구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삶의 질과 분배 구조에 기여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이 지점에서 소버린 AI는 단순한 기술 전략을 넘어 사회 계약의 문제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AI 인프라 구축이 누구를 위한 건지, 생산성 과실은 어떻게 분배되는지, 자동화로 인한 기술 실업 충격은 어떻게 흡수할 건지 등 난제들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만약 소버린 AI가 국가 통제 강화나 국내 산업 보호에만 머문다면, AI 기본사회는 공허한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AI 주권의 기준, 현장 문제 해결력에 달려

무엇보다 연산 능력이 곧 주권이라는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 AI 주권은 확보한 GPU 숫자가 아니라 AI 전환으로 실제 의료·돌봄·제조·행정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했는지로 측정·평가돼야 한다. 예컨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는 국가다. 역발상으로 AI 기반 돌봄 시스템, 원격 의료, 맞춤형 건강 관리 솔루션은 한국이 글로벌 표준을 만들 수 있는 영역이다.

또한 제조업 강국의 강점을 살리면 스마트 팩토리, 산업 AI 분야도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문제 해결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 진정한 AI 주권이다. 이영표 선수는 “월드컵은 경험하는 곳이 아니라 증명하는 곳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AI 소버린의 전쟁터 역시 실적과 성과로 증명해야 하는 곳이다.

둘째, 글로벌 협력을 곧 의존으로 보는 인식은 오해다. 클라우드나 반도체 분야 글로벌 기업과의 협력은 주권 포기가 아니라 전략적 선택이다. 중요한 건 협력 자체가 아니라, 협력을 조율하고 통제하는 역량이다. 한국은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등 우수한 반도체 기업을 보유한 국가다. 이들 기업이 글로벌 AI 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차세대 AI 칩 개발에 참여하고, 그 과정에서 기술 주도권을 확보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려다가 고립되기보다는, 전략적 협력을 통해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다.

셋째, 기술 정책과 사회 정책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AI 기본사회가 성과를 얻으려면 소버린 AI 전략이 복지, 노동, 교육, 지방자치 등 구체적 실천 영역과 함께 설계돼야 한다. AI로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 재교육 프로그램, 디지털 소외계층을 위한 AI 공공서비스의 포용적 설계, 수도권과 지방의 AI 격차 해소 등이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 기술 발전과 사회 통합이 함께 가지 않으면, 소버린 AI는 소수를 위한 특권으로 전락하기 쉽다.

소버린 AI의 핵심 가치는 “우리 것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우리가 뭘 선택하고, 어떻게 활용하며, 어디까지 책임지는가”에 있다. 기술 개발에만 전념하면 자칫 본질을 놓칠 수 있다. 소버린 AI를 통해 더 공정하고 모두가 누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AI 주권이다.

최연구

부경대 과학기술정책과 겸임교수

과학문화칼럼니스트

최연구 부경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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