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말한다. “언제나 희생되는 건 나야.
사람들은 나를 괴롭히고, 내 몸을 뚫어버리지,
도끼로 산산조각을 내기도 하지.
싸움을 걸기도 하고, 이유 없이 학대하기도 해.
내 머리에 앉은 새와 내 다리에 있는 개미를 죽이기도 해,
(중략)
그래도 난 언제나 사람들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
사람들이 나에게 명령했지 ‘뿌리를 내려라’
그러면 나는 힘껏 뿌리를 내려주었지.
‘그늘을 만들어라’ 그러면 도리에 맞는 범위에서 만들었지.
‘겨울을 준비해야지’ 나는 마지막 잎새까지 잃어버렸어.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나는 해야 할 일을 잘 알게 되었지,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이제 더는 나에게 명령할 필요도 없게 되었어.
그러면 왜 저 나무꾼들은 발맞추어 오는 걸까?
사람들이 나에게서 기대하는 걸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하지
사람들이 하늘의 한 조각 구름이나 별자리로 말해준다면,
나는 반항자가 아니고, 누구에게 싸움을 걸지도 않아,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나에게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아,
떠오르는 바람이 나를 캐묻기 좋아하는 숲이 되게 할 때.”
- 쥘 쉬페르비엘(1884~1960)
쥘 쉬페르비엘의 시에서 자연은 의인화되거나 대화적 관계로 나타난다. 의인화를 인간 중심적 사유라고 경계하기도 하지만, 자연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말하려는 노력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이 시에서 “숲이 말한다” 이후의 모든 구절은 큰따옴표 안에 들어 있다. 의인화라기보다는 숲의 목소리를 직접 인용한 것이다. 인간들은 숲을 파괴하고 학대하며 숲에 깃들어 사는 생명체를 죽이기도 한다. “난 언제나 사람들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라고 말하는 숲은 저항하지 않고 순종할 뿐이다. 숲은 인간의 명령에 따라 뿌리를 내리고, 그늘을 만들고, 겨울을 나기 위해 마지막 잎새까지 떨군다. 그런데 후반부에 이르면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한결 위태로워진다. ‘나무꾼들’의 등장 때문이다. 숲은 전멸하러 오는 파괴자들에 두려움을 느낀다. 마지막 두 행을 이끄는 ‘하지만’이라는 접속어가 어떤 불길함을 실어온다. “떠오르는 바람이 나를 캐묻기 좋아하는 숲이 되게 할 때”에서 숲은 질문의 주체가 된다. 쥘 쉬페르비엘은 ‘기후위기’란 말이 나오기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 역시 숲의 반란을 예감했던 것일까. “반항자가 아니고, 누구에게 싸움을 걸지도 않”는 자연이라 해도 인간의 착취를 견디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 임계점을 우리는 며칠 전 네팔에서 빙하가 녹아내려 숲을 덮치고 마을을 휩쓸고 가는 모습에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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