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 클럽' 255곳 달해… SK하이닉스·현대차 등 '포스트 100조' 후보군 약진
대한민국 상장 기업 역사가 새로운 페이지를 넘겼다. 국내 1000대 상장사의 별도 기준 매출 합계가 사상 처음으로 2000조원 고지를 돌파한 것이다.
2008년 매출 1000조원 시대에 진입한 이후 17년 만에 일궈낸 성과로, 한국 경제의 외형적 체급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 정점에는 24년 연속 매출 왕좌를 지키고 있는 삼성전자가 자리했으며, SK하이닉스와 현대자동차 등 주요 기업들이 뒤를 받치며 '매출 2000조'라는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
기업분석전문 한국CXO연구소가 발표한 '1996년~2025년 사이 30년간 국내 1000대 상장사 매출 현황 분석'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1000대 상장사의 전체 매출 규모는 2092조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도인 2024년 1997조원과 비교해 약 95조원(4.8%) 상승한 수치다.
이번 조사는 국내 상장사 중 매출 기준 상위 1000곳(금융업·지주사 포함)을 대상으로 했으며,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사업보고서상 개별(별도) 재무제표를 기준으로 분석됐다.
CXO연구소 관계자는 "연결 재무제표는 글로벌 경쟁력을 확인하기에 적합하지만, 국내 기업 간의 실질적인 규모 비교와 중복 계산 없는 경제 파급 효과를 측정하기 위해 별도 재무제표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국내 기업의 매출 성장사를 연도별로 보면 대한민국 경제의 역동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1996년 당시 390조원으로 400조원에도 미치지 못했던 1000대 기업 매출은 2008년 1197조원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1000조원 시대를 열었다.
이후 10년이 흐른 2018년(1537조원)에 1500조원대에 진입했고,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2020년(1489조원) 잠시 주춤했으나 이후 가파른 우상향 곡선을 그리며 지난해 마침내 2000조원 시대를 맞이했다.
특히 조사 대상 1000곳 중 61.3%에 해당하는 613곳의 매출이 전년 대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 특정 기업의 독주가 아닌 산업 생태계 전반의 외형이 확장되었음을 시사했다.
기업별 분석에서는 삼성전자의 '초격차' 위상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삼성전자의 지난해 별도 기준 매출은 238조4043억원으로, 기존 최고치였던 2022년(211조8674억원) 기록을 크게 넘어섰다. 연결 기준 매출 역시 333조6059억원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 기록을 동시에 갈아치웠다.
삼성전자는 1996년 조사 당시 매출 3위에서 시작했으나, 2002년 처음으로 1위에 올라선 이후 지난해까지 24년 연속으로 국내 재계 왕좌를 지키고 있다. 지난해 1000대 기업 전체 매출 중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11.4%에 달해, 사실상 한국 경제의 10% 이상을 책임지는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매출 순위 '톱 10'에서는 반도체와 자동차, 금융업의 희비가 엇갈렸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SK하이닉스의 약진이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매출 86조8521억원을 기록하며 전년도 5위에서 3위로 두 계단 상승, 사상 처음으로 '빅3' 구도에 진입했다. 이에 따라 기존 3, 4위였던 현대자동차(4위)와 기아(5위)는 각각 한 계단씩 순위가 밀려났다.
6위부터 10위권에는 현대모비스(6위), 한국가스공사(7위), 에쓰오일(8위), 삼성생명(9위), LG전자(10위)가 이름을 올렸다. 특히 삼성생명은 전년 12위에서 9위로 상승하며 10위권 안착에 성공해 금융권의 자존심을 지켰다. 반면 과거 상위권에 포진했던 한국전력공사는 2위 자리는 수성했으나, 업황 부진을 겪은 일부 제조 대기업들은 순위 하락을 면치 못했다.
매출 규모별 허리 구간도 탄탄해졌다. 매출 1조원이 넘는 이른바 '1조 클럽' 기업은 지난해 255곳으로 집계됐다. 2022년(258곳)보다는 소폭 적지만 전년(248곳) 대비 7곳이 늘어난 수치다.
새롭게 1조 클럽에 이름을 올린 기업으로는 광동제약, 에이피알, 실리콘투, 신원, HK이노엔 등이 꼽힌다. 이들은 뷰티, 제약, 패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견고한 성장세를 보이며 중견기업에서 대기업 수준으로 몸집을 불렸다.
매출 10조 원이 넘는 '10조 클럽'은 40곳으로, 1996년 조사 이래 가장 많아졌다. 특히 고려아연은 역대 처음으로 별도 기준 매출 10조원 시대를 열었으며, 삼성중공업은 조선업황 회복에 힘입어 2014년 이후 11년 만에 10조 클럽에 재입성하는 쾌거를 거뒀다.
반면 업황에 따라 고전한 기업들도 적지 않았다. 삼성SDI(-28.8%), 대우건설(-23.7%), 삼성E&A(-30.2%) 등 15개 기업은 매출이 전년 대비 1조원 이상 감소하며 외형 축소를 겪었다. 이는 배터리, 건설 등 특정 산업군의 경기 사이클에 따른 영향으로 분석된다.
한국CXO연구소는 이번 분석을 바탕으로 한국 경제가 '양적 성장'의 새로운 분기점에 도달했다고 진단했다. 특히 삼성전자 한 곳에 의존하던 매출 구조에서 벗어나, 100조원 시대를 넘보는 '차세대 리더'들의 등장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현재 80조원대 매출을 기록한 SK하이닉스를 비롯해 현대자동차 등이 강력한 후보군으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외형 성장이 질적 성장(영업이익)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글로벌 공급망 리스크 관리와 신성장 동력 확보가 필수적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매출 2000조' 달성은 단순한 숫자적 성과를 넘어,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경기 둔화와 보호무역주의 확산 속에서도 강력한 펀더멘털을 유지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지표로 풀이된다. 앞으로의 관건은 삼성전자의 독주 체제 속에서 얼마나 많은 기업이 '100조 클럽'에 합류하며 한국 경제의 허리를 두껍게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오일선 한국CXO연구소 소장은 "지난해 국내 상장사 1000대 기업 매출이 2000조원대에 진입한 것은 대한민국 기업들의 외형 체질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의미한다"며 "현재의 성장 속도를 고려할 때, 향후 2~3년 사이 삼성전자를 제외하고도 별도 기준 매출 100조원을 넘는 기업이 2~3곳 추가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굿모닝경제 노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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