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일보]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가 해마다 반복되면서 살처분과 이동 제한에 의존해 온 방역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2025년 9월부터 2026년 3월까지 국내에서는 고병원성 AI가 149건 발생했고, 가금류 1205만여 마리가 살처분 됐다. 이 가운데 산란계가 전체의 78%를 넘었다. 막대한 경제적 손실과 동물복지 훼손을 감수하면서도 발생이 되풀이된다면 기존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
예방적 백신은 이러한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이다. 국내 연구에서는 산란계와 종계에 백신을 접종했을 때 임상적 보호 효과와 항체 형성이 확인됐고, 해외 메타분석에서도 치사율 감소 효과가 보고됐다. 프랑스는 2023년 오리를 대상으로 예방 접종을 도입한 뒤 고병원성 AI 발생 건수가 396건에서 10건으로 줄었다. 국가별 사육환경과 감시 체계가 다른 만큼 이 수치를 국내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백신 도입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검토할 근거로는 충분하다.
다만 백신은 살처분을 전면 대체하는 수단이 아니라 기존 방역을 보완하는 수단으로 봐야 한다. 접종 이후에도 감염과 바이러스 배출 가능성은 남을 수 있다. 접종 여부와 감염 여부를 구분하는 진단 체계, 유행 바이러스에 맞는 백신주 관리, 접종 이력과 유통 기록, 농장별 감시 체계를 함께 갖춰야 한다. 차단 방역과 역학조사, 철새 도래지와 농장 사이의 오염원 관리도 병행돼야 한다.
정부는 예방 접종을 원칙적으로 배제한 현행 제도를 그대로 둘 것이 아니라 고위험 지역과 축종을 중심으로 단계적 도입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사진=환경일보DB
정부는 예방 접종을 원칙적으로 배제한 현행 제도를 그대로 둘 것이 아니라 고위험 지역과 축종을 중심으로 단계적 도입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오리와 산란계 밀집지역 등 위험도가 높은 곳에서 제한적으로 시행하고, 효과와 부작용, 바이러스 배출량, 유통 영향을 투명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백신 도입이 수출과 거래에 미칠 영향도 생산자와 업계, 전문가가 함께 검토해야 한다.
국내 동물단체가 제안한 대로 국내 항원뱅크를 고도화하고 예방적 백신을 도입할 수 있는 법적 근거와 감시 체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 백신 비용과 접종 인력, 검사 비용의 부담 주체도 분명히 하고, 접종 농가가 출하와 거래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AI 방역의 목표는 살처분 규모를 관리하는 데 있지 않고, 발생 자체와 사회적 피해를 줄이는 데 있다. 과학적 근거가 축적된 수단이라면 금기시할 것이 아니라 조건을 정교하게 설계해 활용해야 한다. 반복되는 대량 살처분을 불가피한 비용으로 받아들이는 방역 체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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