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소설가 김애란이 새 책과 함께 여름 인사를 건넨다. 최근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2024)과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2025)를 펴내며 허구의 세계 안에서 지금 한국사회의 풍경을 세밀하게 그리는 데 집중해온 작가가 이번에 새 이야기를 담아낸 그릇은 소설이 아니라 산문이다. '그랬다고 적었다(펴낸 곳 문학동네)'는 오랫동안 사랑해온 작품을 써낸 작가 김애란의 생생한 다면(多面)과 만난다. 그 면면은 생활인이자 창작자, 사회인의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다. 생활인으로서 김애란은 제주도의 너른 쉼터를 뛰어다니는 강아지를 바라보며 대도시에서와 다른 초록의 풍경을 눈에 담기도 하고, 오랜 시간 오해했던 누군가의 면모를 새롭게 발견하기도 한다.
창작자로서 인공지능 챗봇 챗지피티의 등장을 지켜보며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성찰하기도 하고, 사회인으로서 우리 모두가 함께 겪은 코로나 시기를 돌아보며 진정한 자립과 타인의 의미를 되새기기도 한다. 이 면면은 엄밀히 구분되기보다 서로 섞이고 간섭하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 바탕에는 공통적으로 몸과 마음의 한계를 지닌 사람으로서의 스스로를 인정하는 겸허하고 유연한 태도가 깔려 있다.
『그랬다고 적었다』는 세 개의 부로 이루어져 있다. 김애란이 오랫동안 들여다본 주제이자 이즈음에 접어들어 더 깊고 넓어진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세 가지 관심사, ‘사람’ ‘이야기’ ‘일상’에 대한 탐구가 바로 그것이다.
1부 ‘사람의 얼굴’은 고유명사로서의 사람을 재발견하는 일에서 시작해 일반명사로서의 사람 그 자체를 재인식하는 일로 나아가는 긴 호흡의 글들이 묶여 있다. 김애란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생긴 예기치 않은 병과 그로 인해 달라진 생활을 담담하게 적어내려가며 그 사건이 ‘앎’의 측면에서 불러일으킨 변화에 대해 말한다. 그 변화는 이미 충분히 안다고 생각했기에 더는 궁금해할 여지가 없었던, “하나의 완결된 서사”(62쪽)로 꽉 닫혀 있던 아버지에게 자신이 몰랐던 이야기가 있음을 깨닫는 것에서 온다. 작가는 닫혀 있던 이야기의 문을 용기를 내어 열고,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로 정갈하고 소담하게 채워진 아버지의 작은 세계를 마주한다. 그 세계를 기록하는 작가의 문장은 어느 때보다 단정하고 간결하지만, 우리는 많은 감정과 상황이 응축되어 있는 그 글들을 통해 품위와 예의를 갖추며 가까스로 도달한 놀랍고도 아름다운 산문적 진실을 접하게 된다.
그와 더불어 김애란은 무엇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지 고찰하는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이번 산문집의 뼈대를 탄탄하고 독자적으로 만든다. 올봄 MBC <손석희의 질문들>에 출연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AI와 인간의 차이점’ 등에 대한 토대가 되는 이야기가 이번 책 1부에 실린바, 단점이라 여겨지는 어떤 특징들이 사람을 다른 무엇과도 구분시켜주는 고유한 점임을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전한다.
2부 ‘이야기의 얼굴’은 어린 시절 매혹되어 오랫동안 자기 문학의 원류로 자리잡은 유령 문학에 대한 뜻밖의 애정을 밝히며 시작된다. 학창시절 반 친구들 앞에서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교실 안을 가득 메운 집중의 에너지”(99쪽) 속에서 맛본 희열이 작가로서의 자신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었는지 고백하는 대목은 작가 김애란을 이루는 구성요소를 짐작하게 하는 흥미로운 일화이다. 이 요소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새롭고 다양한 것들로 채워지는데, 김애란은 우리의 전통인 판소리를 즐긴 어느 하루를 돌아보며 요즘과 같이 요약과 빠름이 미덕인 시대에 수용자이자 창작자로서 하게 되는 고민을 천연스럽고도 날카롭게 짚어내기도 하고 다양한 작품을 예시로 들며 우리의 일상에서 이야기가 작동하는 양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 구체적인 목록은 생각의 힘줄이자 삶의 태도로서 이야기가 가진 힘을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 우리에게 또다른 이야기로 건너가는 유연한 파도가 되어준다.
3부 ‘일상의 얼굴’은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는 평범한 하루하루부터 문득 삶이 정지되는 듯 비일상적인 일이 벌어지는 특정 순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통과해나가는 나날의 면모를 그린다. 김애란은 지난 2020년 부분일식 현상으로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설렘과 기대감으로 너울졌던 어느 하루를 애정을 담아 기록하기도 하고, 어린 시절 ‘메이커’ 코트가 다른 사람 눈에 잘 띄도록 상표 위치를 바꿔 달았던 일화를 소개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혼자 있는 상황’이 자유로움이 아니라 어떤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몸에 새겨졌던 코로나 시기의 경험을 밝히거나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해와 그로부터 칠 년이 지난 시기에 눈으로 선명히 목격하고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을 고백하기도 한다. 우리 모두가 겪은 공통의 사건을 다시 불러오며 타인과 이웃, 공동체의 의미를 되새기는 김애란의 문장은 과거가 될 수 없는 어떤 일에 대한 이야기이도 할 것이다.
또하나 특기할 만한 점은 각 부 끝에 수상 소감 또는 축사가 부록 형식으로 실린 것이다. 세 편 모두 마치 마주앉은 상대에게 대화를 건네는 듯 쾌청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감돌아 독자를 글 가까이로 당겨 앉게 하는데, 1부에는 공개 당시 SNS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죽지 않는 꽃」이 실렸다. 사람들 사이에서 챗지피티가 화제되기 시작했을 즈음 챗지피티와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서툴고 오류 많은”(93쪽) 인간 존재에 대해 말하는 글로, 뜨거운 변화를 받아들이는 김애란 작가 특유의 활달하고 넉넉한 사유를 즐거이 따라갈 수 있다. 2부 끝에는 작가의 모교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삼십 주년을 축하하는 글 「각각 한 손씩 빌려」가 자리해 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양한 것을 “시도하고 도모하며 즐거워하던 어린 학교”(151쪽)에서 낯설고 생경한 것을 흠뻑 흡수하며 푸릇하게 자라난 작가가 그 배움을 가능케 한 학교와 한 시기를 향해 건네는 축사이자 헌사가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3부에는 역시 작가의 모교인 대산초등학교 백 주년을 축하하는 글인 「다시 나가 놉시다」가 배치되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린 어린 시절을 경유해 맞은편에 있는 어린이들을 애정을 담아 마주보며 “이제 다 함께 다시 나가 놉시다”(214쪽) 청유하면서 끝나는 이 글은 책 바깥에 있는 우리에게로 건너와 책이 마무리된 후에도 무언가가 새로이 시작될 듯한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 무언가는 아마 작가가 다채롭게 풀어놓은 여러 이야깃거리를 둘러싼 우리의 대화이리라.
우리가 바라보는 누군가, 무언가의 얼굴은 시간의 집약체로 만들어진 하나의 공간이다. 어떤 시간을 가뿐하게 흘려보내거나 간신히 넘기면서 새겨진 인상과 표정, 눈빛이 그 안을 채운다. 그러니 김애란이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볼 때, 오랫동안 그 자신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업이자 태도인 이야기의 얼굴을 바라볼 때, 어느 때는 소소하게 지나가고 어느 때는 놀라운 모험으로 펼쳐지는 일상의 얼굴을 바라볼 때, 다시 말해 시간의 얼굴을 바라볼 때 우리는 ‘거울 앞에 서지 않는 한 결코 볼 수 없는 우리의 얼굴’(199쪽)을 마치 손전등을 환히 켠 듯 구석구석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언어가 지닌 실질적인 힘과 품격이자 김애란이 이번 책을 통해 마법처럼 해낸 일일 것이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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