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기 필리핀 법인(SEMPHIL) 전경. 사진 제공=삼성전기
삼성전기(009150)
가 필리핀 적층세라믹콘덴서(MLCC) 신공장을 내년 1분기 말부터 가동한다. 지난해 말 현지 정부와 투자 조건을 조율하기 시작한 지 불과 15개월 만이다. 글로벌 빅테크와 체결한 장기공급계약(LTA)을 발판으로 양산을 빠르게 밀어붙이는 ‘수주 연계형 초고속 증설’ 전략이 본격화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2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기는 필리핀 라구나주 칼람바에 건설 중인 MLCC 제3공장을 이르면 내년 1분기 말부터 가동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해 12월까지만 해도 공장 부지를 확보한 뒤 현지 정부와 세제 지원, 전력 공급 등 세부 조건을 협의하는 단계였지만 이후 올 상반기 공사에 들어가면서 속도가 붙었다. 빨라야 내년 하반기로 전망되던 양산 시점 역시 대폭 앞당겨졌다.
MLCC는 전기를 저장했다가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반도체 핵심 부품이다. 이번 신공장은 그중에서도 인공지능(AI) 가속기에 쓰이는 고용량 ‘1005(가로 1.0㎜·세로 0.5㎜) 규격 47㎌(마이크로패럿)’ MLCC 전용 생산 시설로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AI MLCC’로 불리는 이 제품은 엔비디아의 하반기 신형 가속기 ‘베라 루빈’에 80만 개, 후속 제품인 ‘파인만’에 100만 개가 탑재될 것으로 전망되며 수요가 본격적으로 커지고 있다.
반면 AI MLCC는 125℃ 이상의 고온과 고전압에서도 성능을 유지해야 해 양산이 어려운 탓에 공급업체가 삼성전기와 일본 무라타 등 소수에 그친다. 특히 삼성전기의 경우 부산사업장을 비롯한 기존 공장의 MLCC 생산능력이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2분기 MLCC 가동률은 90%대 중반을 기록했고 3분기에는 90%대 후반까지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기는 이 같은 공급 부족 상황에서 증설을 앞당김으로써 최근 급증하는 빅테크 수요를 선점할 방침이다. 이와 관련해 삼성전기는 지난달 30일 올해 2분기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톱티어 하이퍼스케일러(초대형 데이터센터 사업자) 등 10여곳과 MLCC 관련 LTA를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이를 통해 중장기적 수요를 선제적으로 확보하는 동시에 상당한 규모의 선급금을 받아 증설에 필요한 재원도 마련했다.
삼성전기는 특히 신공장 가동과 함께 부산 공장의 MLCC 증설을 추진해 MLCC 생산능력을 매년 최대 20%씩 확대할 계획이다. 기존 생산라인도 모바일·정보기술(IT) 기기용 MLCC보다 AI MLCC 비중을 키우는 방향으로 재편한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기는 3분기 MLCC 수익성 개선에 힘입어 전사 매출이 2분기 대비 10%대 초반 증가할 전망”이라며 “특히 MLCC 매출 전체에서 AI 서버용 제품 비중이 2분기 10%대 후반에서 3분기 약 20%로 확대되는 점이 실적 개선을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기의 설비투자(CAPEX) 규모도 올해 3조 원에서 내년 6조 원으로 2배 늘어 인프라 투자가 집중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필리핀 신공장에는 최근 증설 계획이 발표된 베트남 신공장과 비슷한 1조 원 이상이 투입될 것으로 추산된다. 삼성전기는 47㎌을 넘어 68㎌와 150㎌급 고수익·고용량 신제품 개발도 서두르고 있다.
삼성전기는 이번 신공장 구축을 통해 ‘선수주·후증설’ 전략도 본격화한다. 기존 ‘선투자·후수주’ 방식은 수년 뒤 수요를 예상해 먼저 공장을 짓고 양산 시점에 고객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업황이 꺾이면 유휴 설비와 감가상각비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리스크가 있다. 반면 선수주·후증설 전략은 빅테크와 1~5년의 LTA 체결을 통해 수요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것은 물론 고객사로부터 받은 선급금을 생산시설 확충에 빠르게 재투자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최근 MLCC 공급 부족으로 빅테크들이 물량을 선제적으로 확보하려 들면서 LTA를 통한 선수주·후증설 방식이 업계의 새로운 트렌드로 부상했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기가 필리핀과 부산을 중심으로 증설에 속도를 내는 것은 이번 AI 부품 사이클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승부수”라며 “고객들이 ‘얼마면 MLCC를 팔겠느냐’고 물을 정도로 AI용 고용량 MLCC 수급이 빠듯한 상황인 만큼 생산능력을 선제적으로 확보해야 할 시점”이라고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2024년 10월 필리핀 라구나주 칼람바에 위치한 삼성전기 필리핀법인을 찾아 생산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 제공=삼성전자
삼성전기가 생산하는 다양한 크기의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사진 제공=삼성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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