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중앙정부·정책금융 손잡고 합작조선소 설립 본격화
초도 물량은 국내 조선소서 건조…인력 양성·기술 이전 병행
삼성중공업·한화오션도 상선·특수선 축으로 인도 공략 확대
HD현대 정기선 회장(뒷열 맨 오른쪽)과 HD한국조선해양 김형관 대표(앞열 맨 오른쪽)등 관계자들이 2026년 1월 인도 뉴델리 총리 관저에서 열린 '글로벌 에너지 리더 라운드테이블'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사진=인도 총리실 홈페이지
HD현대가 인도에 선박을 파는 단계를 넘어 조선소와 기술, 인력 양성 체계, 기자재 공급망까지 함께 옮기는 'K-조선 생태계'를 수출한다.
인도 정부가 조선산업 육성을 국가 전략으로 끌어올린 가운데 HD현대는 중앙정부 산하 추진기구와 정책금융 축을 동시에 파트너로 확보하며 현지 합작조선소 설립을 본격화했다. 개별 선박 수주를 넘어 생산체계와 운영 노하우 자체를 수출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HD현대는 20일 인도 뉴델리에서 인도 ‘NSHIP TN’과 사가르말라 금융공사(SMFCL)와 신규 조선소 설립 투자에 필요한 핵심 인프라 구축 및 합작법인 설립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고 21일 밝혔다.
이번 협약에 따라 HD현대는 NSHIP TN, SMFCL이 조성하는 조선투자펀드와 함께 신규 합작조선사(JV)를 설립하고 최대주주로서 조선소 운영 전반을 총괄하게 된다.
NSHIP TN은 인도 중앙정부 산하 VOC 항만청이 주도해 설립한 특수목적법인으로, 향후 정부 지원 정책과 각종 인센티브를 집행하는 역할을 맡는다. 기존 타밀나두주와의 협력을 넘어 중앙정부 차원의 협력 축까지 확보하면서 사업 구조가 한층 구체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은 단순한 현지 생산기지 확보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인도 정부는 신규 합작조선소가 본격 가동되기 전 자국 내 선박 건조 수요의 초도 물량을 HD현대 국내 조선소에 발주하고, 자국 인력을 한국 조선소에 파견할 방침이다.
국내 조선소에서 선박 건조 노하우를 익힌 인력이 향후 현지 합작조선소 설립과 운영에 참여하는 구조다. 한국에서 먼저 배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기술과 운영 체계까지 전수하는 일종의 ‘선 수주, 후 현지화’ 모델인 셈이다.
이 같은 전개는 지난 1월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이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글로벌 에너지 리더 라운드테이블’에서 나렌드라 모디 총리와 조선 협력 방안을 논의한 뒤 속도를 낸 흐름과 맞닿아 있다.
앞서 HD현대는 지난해 12월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와 신규 조선소 건설에 관한 업무협약을 맺은 바 있다. 지방정부와의 초기 논의를 중앙정부, 정책금융, 투자펀드까지 연결해 사업화 단계로 끌어올린 것이다.
HD현대가 앞세운 승부수는 ‘스마트 조선소’다. 회사는 인도 내 산학 협력을 기반으로 자동화와 AI 기반 스마트 조선 기술을 적용한 디지털 조선소 구축을 추진하고, 인도 조선 인력 양성센터 설립도 지원할 계획이다. 선박 몇 척을 건조해 주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설계와 생산, 운영 시스템 전반을 패키지로 이전하는 방식이다. 인
도 입장에서는 조선산업의 ‘손발’뿐 아니라 ‘두뇌’까지 들여오는 셈이고, HD현대 입장에서는 울산에서 축적한 조선소 운영 모델 자체를 수출하는 첫 사례에 가깝다.
국내 협력사들에도 적지 않은 기회가 열릴 전망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HD현대 단독 진출이 아니라 국내 조선업 생태계 전체의 외연을 넓히는 ‘클러스터형 진출’ 성격도 갖는다.
HD현대는 신규 합작조선소의 성공적인 운영을 위해 블록, 엔진 등 국내 조선 기자재 업체들의 현지 진출을 지원할 방침이다. 조선소 한 곳이 새로 들어서면 선체뿐 아니라 엔진, 전장, 자동화 설비, 각종 후방 부품 공급망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인도 조선시장은 아직 글로벌 비중이 크지 않지만 성장 기대는 높다. 인도 정부는 ‘Maritime India Vision 2030’을 통해 글로벌 점유율 5% 확보와 세계 5위권 진입을 목표로 내걸고, 2030년까지 세계 수준의 조선소 10곳 육성과 자국 선박 건조 비율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약 2조5000억루피 규모의 해양개발펀드와 조선금융지원제도 연장, 대규모 해양 인프라 투자 패키지도 병행하고 있다.
국내 조선사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올해 1월 인도 국영 석유공사 ONGC와 협력해 인도 국적의 초대형 에탄운반선(VLEC) 2척 건조 계약을 체결하며 에너지 공급망 파트너로 입지를 넓혔다.
한화오션은 잠수함 등 특수선 분야를 축으로 인도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으며, 인도의 대형 잠수함 사업인 ‘P-75I’ 등에서 유력 기술 협력 후보군으로 거론된다.
삼성중공업과 한화오션이 각각 상선·에너지, 특수선·방산 축에서 인도와 접점을 넓히고 있다면, HD현대는 조선소 자체와 운영 시스템, 인력 양성, 기자재 공급망까지 한꺼번에 들여가는 구조를 선점하고 있다.
인도는 제조업 부흥과 해양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한국의 조선 운영 모델을 원하고, HD현대는 인도를 통해 신규 물량 확보와 해외 거점 확대, 새로운 사업 모델 구축을 동시에 노리고 있다.
회사 측이 이번 협약을 양국 간 조선 산업 협력이 사업화 단계에 진입한 신호라고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도가 원하는 것은 배 몇 척이 아니라 조선산업을 일으킬 시스템이며, HD현대는 그 시스템을 통째로 들고 들어가고 있다.
HD현대의 인도 행보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7월에는 인도 최대 국영 조선사인 코친조선소(CSL)와 포괄적 협력 업무협약을 맺고 설계·기자재 지원, 생산성 향상, 인력 역량 강화 등에 협력하기로 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타밀나두주 정부와 신규 조선소 건설에 관한 배타적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번 협약은 주정부와의 초기 논의를 넘어 중앙정부와 금융기관까지 끌어들여 사업화 단계로 한 단계 끌어올린 후속 작업이다.
이번 협력이 현실화하면 초도 물량은 국내 조선소가 맡아 단기 일감을 확보하고 이후 현지 JV 설립과 인력 양성, 스마트조선소 전환, 협력사 진출까지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할 전망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