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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박태웅의 디지털]우리는 빼고 남은 어떤 것이 아니다

“인공지능(AI)이 코딩, 번역, 디자인은 물론 연구, 창작까지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그렇다면 AI 시대에도 끝까지 인간의 영역으로 남을 능력은 무엇인가?”

[박태웅의 디지털]우리는 빼고 남은 어떤 것이 아니다

자주 이런 질문들을 받는다.

“인공지능(AI)이 코딩, 번역, 디자인은 물론 연구, 창작까지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그렇다면 AI 시대에도 끝까지 인간의 영역으로 남을 능력은 무엇인가?”

“AI 에이전트가 사람 대신 회의하고, e메일을 쓰고, 업무를 처리하는 단계까지 왔다. 앞으로 직장에서 인간은 어떤 역할을 맡게 될까?”

“학생들이 ‘이건 AI에게 시키면 되는데 왜 공부해야 하죠?’라고 묻는다. 그럼에도 인간이 반드시 배워야 하는 지식과 훈련은 무엇이라고 보나?”

질문들이 공유하는 문법은 하나다. “당신은 여전히 쓸모 있는가?” 그 쓸모의 판정기준이 모두 AI, 인공지능이다. 이런 구도에서는 인공지능이 못하는 것의 목록이 곧 인간의 정의가 된다. 말하자면 잔여가치론이다. 인간을 기계의 나머지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 정의에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기계가 나아질 때마다 인간이 줄어든다. 정의 자체가 자기잠식적이다.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은 위로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가치를 인공지능의 성능 곡선에 종속시키는 문장이다.

산업사회 공장 ‘일꾼’ 규정서

AI가 못할 것을 하는 존재로

인간을 ‘잔여 가치’ 보는 시선

‘쓸모’ 넘는 생각을 해야 할 때

다른 글에서 이렇게 썼다. “지금의 학교는 산업시대의 고안품이다. 산업사회의 만트라는 규격화, 표준화, 대량생산이다. 학교는 공장과 거울처럼 대응한다. 위계가 있고, 생산라인의 분업에 조응하는 개별과목들이 있다. 공장에 일 자체의 만족이 아니라 임금·상여금과 같은 외재적 보상이 있는 것처럼, 학교에는 공부 자체의 즐거움 대신 성적·상벌과 같은 보상이 있다. 순종하고 근면하며 표준화된 실행을 할수록 학교는 높은 평가를 내린다. 그것은 공장에서 가장 중요히 쓰일 가치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금 주어진 질문들은 모두 산업사회의 질문들이다. 사람의 ‘쓸모’를 묻는다. 그 ‘쓸모’는 말하자면 일꾼으로서의 쓸모다. 공장을 위한 쓸모다. 가치가 언제나 사람의 바깥에 있다.

1958년에 이런 질문을 한 사람이 있다. 해나 아렌트는 그해 펴낸 <인간의 조건>에서 이렇게 말한다. 근대는 인간의 노동을 오로지 생존을 위한 소모적 반복으로 만들어 버렸다. “자동화는 노동의 사슬로부터 해방되려는 노동자들의 사회를 낳는데, 그 사회는 이제 그 자유를 얻을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들어줄, 더 높고 의미 있는 활동들을 알지 못한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셋으로 나눴다. 생존을 위한 노동(labor), 나보다 오래 남을 어떤 것을 만드는 작업(work),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말과 행동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내는 행위(action). ‘근대는 이 셋을 노동 하나로 뭉개버렸다’고 아렌트는 말한다. 우리는 생존을 위한 소모적 반복 외에 다른 더 높고 의미 있는 활동을 할 방법을 잊었다는 것이다.

케인스는 대공황의 한복판이던 1930년, ‘우리 손주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강연에서 100년 뒤 인류가 누릴 지극히 풍요로운 미래를 예측했다. 세상이 무너지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

케인스는 당대의 비관이 과잉이라고 얘기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기술적 실업’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노동 사용을 절약하는 수단을 발견하는 속도가, 노동의 새로운 쓰임새를 찾는 속도를 앞지름으로써 생기는 실업.” 말하자면 AI 실업 논의의 원형이 여기 있는 셈이다.

케인스는 100년 뒤 진보한 나라들의 생활수준은 지금의 4배에서 8배가 될 것이라 예측했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경제 문제가 해결되면 인류는 전통적 목적을 잃는다. “그리하여 창조 이래 처음으로 인간은 자신의 진짜 문제, 항구적 문제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절박한 경제적 근심으로부터 얻은 자유를 어떻게 쓸 것인가? 과학과 복리가 그에게 벌어다준 여가를 어떻게 채워서 지혜롭고 유쾌하게 잘 살 것인가?”

그는 흔히 주 15시간 노동을 주창한 사람으로 불리곤 한다. 그러나 그의 말은 정확히 이러하다. “하루 3시간 교대나 주 15시간 노동이면 이 문제를 꽤 오랫동안 미뤄둘 수 있을 것이다. 하루 3시간이면 우리 대부분 안에 있는 옛 아담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니까.” 15시간은 단지 ‘유예’였다.

그의 강연은 이런 낙관론으로 매듭지어진다. “우리는 다시 한번 수단보다 목적을 귀하게 여기고, 쓸모 있는 것보다 좋은 것을 택하게 될 것이다.” 케인스가 말한 100년 뒤가 바로 2030년이다. 4년 남았다. 그때 우리는 쓸모 있는 것보다 좋은 것을 택하게 될 수 있을까?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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