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복상장 규제 필요하나 옥석 가려야
자금조달 투자회수 M&A 막힐 수도
벤처생태계 성장사다리 걷어차선 안 돼
박일근 한국일보 수석 논설위원
증시가 거침없다. 신고가가 잇따르며 코스피는 어느새 7,000선도 뚫을 기세다. 이렇게 시장이 뜨거울 땐 기업공개(IPO)가 봇물을 이루는 게 정상이다. 상장으로 자금을 확보한 기업이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나서면 경제가 좋아져 주가는 더 오른다. ‘생산적 금융’이 그리는 선순환 구조다.
그런데 1분기 국내 기업 상장은 단 11곳에 그쳤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하면 반 토막에도 못 미쳤다. 역사적 대세 상승장에서 기업 자금 조달 창구로서 증시의 역할이 더 커져야 하는데 정반대의 결과는 의외다. 이유가 뭘까.
거래소의 상장 심사 기준이 이전보다 까다로워진 측면이 크지만 투자업계에선 정부의 중복상장 규제가 미친 영향에 주목한다. 중복상장이란 이미 모회사가 상장된 상태에서 핵심 사업부나 자회사를 또 상장하는 걸 일컫는다. 정부가 이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뒤 사실상 IPO 시장은 멈춰선 상태다. 실제로 LS의 전선 자회사 에식스솔루션즈는 상장 예비심사를 청구했다 논란이 일면서 이를 철회했다. SK에코플랜트 HD현대로보틱스 한화에너지의 상장 일정도 안갯속이다.
문제는 대기업보다 중견 중소 벤처기업들의 타격이 더 크다는 데에 있다. 인공지능(AI) 데이터 분석 기업 H사, 해운 항만 정보기술(IT) 솔루션 기업 S사, 열교환기 제조사 D사, 신약개발 및 바이오 의약품 회사 등 혁신 벤처 기업이나 유망 스타트업 중에도 발목이 잡힌 곳이 적잖다.
중복상장이 한국 증시의 고질병으로 꼽혀온 건 사실이다. 모회사가 성장성이 큰 사업부를 쪼개거나 알짜 자회사를 별도 상장하는 경우 모회사 주가 하락은 피하기 힘들다. 모회사와 자회사가 동시 상장되다 보니 기업 가치와 이익이 이중으로 계산되는 문제도 생긴다. 주요국에 비해 유독 높은 우리나라의 중복상장 비율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한 원인도 됐다. 수술을 미룰 순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칼날은 정확하게 겨눠야 한다. 무엇보다 대기업의 쪼개기 상장과 혁신 기업의 성장형 상장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전면 금지할 게 아니라 섬세한 옥석 가리기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기업의 규모나 산업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자회사란 이유만으로 철퇴를 내리면 정상적인 인수합병(M&A)과 상장을 통한 자금 조달의 길까지 원천 봉쇄될 수 있다. 사실 상장 시 높은 수익률로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사라지면 벤처나 스타트업에 선뜻 자금을 넣으려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미 M&A 시장도 위축되고 있다. 사모펀드(PEF) 업계에선 투자를 하고 싶어도 빠져나올 출구가 불확실해지면서 제값을 못 받거나 거래가 성사되지 않는 경우가 잇따르고 있다는 하소연이 적잖다.
상장을 전제로 외부 자금을 빌리거나 일부 지분을 미리 판 기업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상장이 안 되면 곧바로 대출을 갚거나 지분을 다시 사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불황과 전쟁에 한 푼이 아쉬운 기업들은 자금난에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
대기업의 무분별한 쪼개기 상장을 막아 자본시장의 건전성을 높이고 일반 주주의 이익을 보호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다만 이 과정에서 일률적 금지로 혁신의 씨앗이 사장되거나 벤처 생태계를 떠받쳐온 성장의 사다리까지 걷어차는 우를 범해선 곤란하다. 주주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기업의 성장을 지원하고 국가 경쟁력을 키울 균형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 누구보다 ‘생산적 금융’을 강조하고 있는 이재명 정부 아닌가. 중견 중소 벤처 스타트업 기업들이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길이 넓어져야 망국적인 부동산 투기에서 생산적인 투자로의 ‘머니 무브’도 속도가 날 수 있다. 진정한 ‘생산적 금융’의 꽃을 피우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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