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

[박윤정의 위클리투어] 대전서 '먹과 빛, 커피' 사이 걸어보니

대전은 오랫동안 ‘지나가는 도시’였다. 1905년 경부선 대전역이 들어서고 호남선이 이어지면서 근대 도시의 골격이 만들어졌고, 1932년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옮겨오며 행정 도시로 성장했다. 1970년대 대덕연구단지 조성 이후에는 ‘과학 도시’라는 새로운 이름도 얻었다.

[박윤정의 위클리투어] 대전서 '먹과 빛, 커피' 사이 걸어보니

이응노미술관 전경. 사진=박윤정 민트투어 대표

대전은 오랫동안 ‘지나가는 도시’였다. 1905년 경부선 대전역이 들어서고 호남선이 이어지면서 근대 도시의 골격이 만들어졌고, 1932년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옮겨오며 행정 도시로 성장했다. 1970년대 대덕연구단지 조성 이후에는 ‘과학 도시’라는 새로운 이름도 얻었다. 철도가 사람을 모았다면 과학은 도시의 미래를 바꿨다.

요즘 대전의 표정은 한층 다양하다. 중앙시장과 대흥동, 으능정이 문화의 거리에는 원도심의 시간이 남아 있고, 옛 철도관사촌이 있던 소제동에는 카페와 새로운 상업 문화가 들어왔다. 성심당으로 대표되는 빵 문화는 이제 당당한 관광 콘텐츠다. 여름이면 중앙로 일대에서 ‘대전 0시 축제’가 열리고, 과학 도시답게 과학 문화 행사도 이어진다. 빵과 철도, 과학과 예술이 한 도시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는 것이 대전의 재미다.

◇ 먹과 여백 닮은 집 ‘이응노미술관’

둔산 대공원에 들어서 이응노미술관을 처음 마주하면 건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웅장한 기념비보다는 공원에 낮게 내려앉은 흰색의 집에 가깝다. 벽과 기둥 사이로 빛이 들어오고 마당과 통로가 이어진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흰 벽 위의 그림자도 조금씩 움직인다.

2007년 개관한 미술관은 프랑스 건축가 로랑 보두엥이 설계했다. 건축의 중요한 모티브는 이응노의 1972년 작품 ‘수(壽)’다. 한자의 획을 해체하고 재구성한 작품처럼 건축도 벽과 기둥, 마당과 선의 리듬으로 펼쳐진다. 작품을 담는 그릇이라기보다 이응노의 그림을 입체적인 공간으로 번역한 건축에 가깝다.

고암 이응노(1904~1989년)는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전통 서화에서 출발했지만 평생 자신의 형식을 바꿨다. 대나무와 난초를 그리던 붓은 풍경과 인물을 지나 추상으로 향했고, 1958년 프랑스로 건너간 뒤에는 동양의 서예와 서구 현대미술을 자신의 방식으로 결합했다. 그의 문자추상 앞에서는 ‘글씨인가, 그림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한자의 획은 잘리고 반복되면서 본래 의미를 잃고 점과 선, 면의 리듬으로 변한다. 가까이에서는 문자 같지만 몇 걸음 물러나면 완전한 추상화다. 서구의 추상을 모방하기보다 먹과 붓, 한자라는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에서 현대성을 찾아냈다는 점이 이응노 예술의 힘이다.

전시장에서는 먹빛도 모두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짙은 검정, 물이 번진 회색, 마른 붓이 지나간 거친 흔적 사이에 여백이 놓인다. 동양화에서 여백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아니라 이미지가 숨 쉬는 공간이다. 이응노의 작품에서도 그 비어 있음이 오히려 화면에 긴장을 만든다.

후기 연작인 ‘군상’ 앞에서는 발걸음이 오래 머문다. 짧고 힘 있는 붓질로 그려진 사람들은 팔을 벌리고 뛰거나 춤추는 듯한 움직임을 만든다. 가까이에서는 한 사람인데 뒤로 물러서면 거대한 군중이 되고, 더 멀어지면 문자나 물결처럼 보인다. 개인이 모여 공동체가 되고 다시 하나의 추상이 되는 장면이다.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작가의 경험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작품 앞에서는 정치적 해석을 넘어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보다 보편적인 생명력이 먼저 다가왔다.

전시를 보고 밖으로 나오자 처음 봤던 건물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림 속 선과 여백이 벽과 지붕, 마당 사이에서 되풀이되고 있었다. 작품을 보고 건축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 작은 미술관의 매력이었다.

대전시립미술관에 백남준의 ‘프랙탈 거북선’이 전시돼 있다. 사진=박윤정 민트투어 대표

◇ 백남준 ‘거북선’과 미술관 ‘비밀창고’

몇 걸음만 옮기면 1998년 개관한 대전시립미술관이다. 두 미술관이 이웃하고 있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이응노라는 한 작가의 세계에 깊숙이 들어갔다면 이곳에서는 한국 현대미술의 여러 흐름을 넓게 만난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백남준의 ‘프랙탈 거북선’이다. 전통 거북선의 형상 위에 텔레비전 모니터와 영상 장비가 겹쳐 있다. 과거의 선박은 전자기기의 집합체가 돼 새로운 시대의 이미지로 변한다. 역사책에서 보던 거북선이 갑자기 전자시대의 생명체가 된 것 같다.

거북선이 16세기 기술의 상징이라면 텔레비전은 20세기 정보 사회를 대표하는 매체다. 백남준은 수백 년 떨어진 두 시간을 한 작품에 충돌시켰다. 과거와 미래가 직선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접속하고 뒤섞인다는 그의 상상력이 흥미롭다. 과학 기술을 도시의 중요한 정체성으로 삼아온 대전에 이 작품이 있다는 것도 절묘하다.

또 하나의 발견은 열린 수장고였다. 미술관에서 우리가 보는 작품은 소장품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온도와 습도가 관리되는 수장고에서 다음 전시와 연구를 기다린다. 수장 공간을 들여다보자 미술관의 의미도 달라졌다. 전시장이 미술관의 얼굴이라면 수장고는 기억을 보존하는 장소다. 무엇을 수집하고, 무엇을 남겨 다음 세대에 보여줄 것인가. 결국 미술관은 아름다운 작품을 전시하는 곳인 동시에 한 시대의 기억을 선택하고 보존하는 기관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카페 ‘슬로워크 커피스탠드’ 내부. 사진=박윤정 민트투어 대표

◇ 마지막 작품, 스페셜티 커피 한 잔

슬로워크 커피스탠드에서 스페셜티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이름처럼 오늘의 동선에는 ‘슬로 워크’(Slow Walk)가 잘 어울린다. 커피는 식어가면서 향과 산미, 단맛의 인상이 달라진다. 작품도 전시장 안에서 본 순간과 그곳을 떠난 뒤의 기억이 다르다. 작품 앞에서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 미술관을 나온 뒤 천천히 떠오르곤 한다.

커피를 마시며 오늘 걸었던 길을 되짚는다. 철도로 성장하고 과학으로 미래를 꿈꾼 도시에서 우리는 한 화가의 먹과 문자, 백남준의 전자 이미지, 그리고 미술관 깊숙한 곳에 보관된 기억을 만났다. 대전은 어쩌면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끊임없이 환승하는 도시인지도 모른다.

철도와 과학이 만나고, 서예가 추상미술로 이어지며, 거북선은 비디오아트가 된다. 그래서 대전에서는 조금 천천히 걸어도 좋겠다. 때로 한 도시를 기억하게 하는 것은 유명한 관광지의 숫자가 아니라 한 줄의 먹선과 조용한 미술관, 그리고 천천히 식어가는 커피 한 잔이니까.

박윤정 민트투어 대표 pyj@minttour.co.kr

이 기사 공유하기
페이스북X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i

댓글

0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이 기사에 첫 의견을 남겨보세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