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15일 서울역 대합실에서 승객들이 이세돌 9단과 구글 딥마인드의 바둑 인공지능(AI) 알파고의 마지막 제5국 대국 중계를 텔레비전으로 지켜보고 있다. AP 연합뉴스
김경욱 | 산업팀장
바둑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한때 신문에 실린 바둑 관전기 앞을 오랫동안 서성였던 것은 그의 문장 때문이었다. 바둑 전문기자였던 박치문의 기사 속 바둑은 승부의 냉혹함과 삶의 비장미가 흐르는 한편의 드라마였다. 바둑을 단순한 ‘보드게임’으로 치부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십수년 전 당시의 나는 생각했다.
그는 대국의 주요 국면을 소개하며 무표정한 문장을 쓰지 않았다. 예컨대 백진을 깊이 파고들었다가 퇴로가 차단된 흑돌이 사로잡히는 장면에서 그는 “흑 2점이 잡혔다”는 상투형을 버렸다. 대신 “상변 침투에 앞장섰던 흑들은 결국 적진을 벗어나지 못한 채 ‘고혼’이 되고 말았다”는 식의 문장을 썼다.
기보 해설을 하며 착수를 앞둔 텅 빈 바둑판을 쓴 대목도 장엄했다. 첫 글자를 쓰지 않은 백지를 닮은 빈 바둑판에 대해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싶지만, 그는 달랐다. “망망대해의 어디에 나의 삶이 존재하는가. 이제 나는 칼을 품고 대해로 나가려 한다. 나는 과연 살아 돌아올 수 있는가”라는 문장으로 전장의 문턱에 선 기사에게 서사를 부여했다. 그의 문장 속에서 가로·세로 19줄 반상은 비극의 전장이었고, 흑돌과 백돌의 사투는 고독한 기사들이 온 힘을 다해 써 내려가는 한편의 서사시였다.
하지만 내게 그 낭만의 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10년 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은 내가 탐닉했던 문장들을 무력한 수사로 전락시켰다. 관전기나 기보 해설 속 바둑 기사의 고뇌와 기풍은 돌의 위치에 따라 바둑판 위의 모든 경우의 수를 순식간에 분석해 최적의 승률을 따져 수를 제시하는 인공지능(AI) 앞에서 낱낱이 해체되었다. 인공지능이 압도적인 효율로 정답을 찍어내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간의 주저함과 전장에서 죽어나간 돌에 숨을 불어넣던 문장들은 빛을 잃게 된 것이다.
이제 프로 바둑 기사들은 수백년 동안 대물림되던 인간의 기보에서 수를 찾지 않는다. 인공지능이 점지하는 확률의 수치로 효율과 실리를 따진다. 인공지능끼리 둔 기보를 보며 공부하고, 인공지능이 추천하는 ‘푸른 점’(블루스폿·승률이 가장 높은 수)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사람의 바둑이 사라진 자리에 문장은 설 자리를 잃었고, 기계의 계산만이 남은 형국이다.
알파고가 등장했을 당시 바둑 기사들이 느꼈을 상실감과 위기감은 이제 수많은 산업 영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오랜 시간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며 쌓아온 숙련공의 기술이 인공지능으로 대체되고, 피지컬 에이아이의 등장은 이런 변화를 더욱 재촉한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문장을 벼려온 작가, 한장의 그림을 위해 수없이 붓을 들어온 화가, 한소절을 위해 끝없이 악보를 고쳐 써온 작곡가 등도 인공지능 앞에서 공력의 결실을 잃어가고 있다.
인공지능에 모의전쟁 게임을 시켜본 결과, 인공지능은 지정학적 위기 상황에 놓였을 때 핵무기 사용을 거의 주저하지 않았다. 픽사베이
더욱 음울한 점은 인공지능이 바둑판을 넘어 인류의 생사가 달린 실제 전쟁 지휘소까지 점령했다는 사실이다. 정보 분석에 머물던 인공지능은 이제 표적 식별에서 타격 실행에 이르는 전 과정에 개입하며 전쟁의 의사결정 구조를 바꿔놓았다. 인공지능을 전장의 ‘두뇌’로 투입한 미국의 이번 이란 공습이 전쟁사에서 특이점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인공지능에는 사람의 눈과 마음이 없다. 윤리적 금기마저 최적값 도출을 위해 사용한다.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연구진이 최근 내놓은 인공지능 모의 전쟁 실험 결과를 보면, 인공지능은 위기 상황에서 95%의 확률로 핵무기 사용을 결정했다. 도덕적 주저함 없이, 오직 승리라는 최적값을 도출하기 위해 핵 버튼을 누른 것이다.
인공지능은 더는 도구가 아니다. 인간의 판단을 대신하며 통제할 수 없는 위험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중이다. 인공지능 개발 후발주자인 한국 사회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기술 격차 그 너머다. 이 기술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수호하는 경계 안에서 작동하도록 통제하는 ‘규범의 주도권’을 세계 무대에서 어떻게 쥘 수 있는가. 그 고민에 따른 한 수에 사활을 걸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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