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을 찾아서 ㉞]
걱정·근심은 덜어내고, 다정한 위로를 건네는 곳
수영장·체육관·도서관이 융합된 복합문화공간
영등포 신풍역 4번 출구를 빠져나와 책마루를 향해 걷는 10분 남짓. 그 길의 풍경은 정겹고도 묘했다. 낡은 중고 가전 가게를 지나치면, 동네 야채가게 안 평상에서 손님과 주인이 마주 앉아 다정하게 식사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은 허름한 그 골목길이 정겹다고 느낄 즈음, '포레나'라는 신축 아파트 단지가 나타나고 그 끝머리에 다섯 권의 책을 층층이 쌓아 올린 듯한 독특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신길 책마루 문화센터'다.
신길 책마루 문화 센터 전경 (사진 = 문화센터 홈페이지)
신길뉴타운 개발 당시 기부채납된 이 부지는, 낡은 동네가 화려한 아파트 숲으로 천지개벽하는 동안 주민들이 가장 목말라했던 '문화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지어진 곳이라고 한다. 이곳이 완성되기까지 무려 18년이라는 긴 산고의 시간이 필요했고, 오랜 기다림 끝에 문을 연 이곳은 지하의 수영장, 1층의 체육관, 그리고 윗층의 도서관이 한 건물에 융합된 파격적인 복합문화공간으로 태어났다. 수영장, 북카페 그리고 서가가 함께 하며 몸과 마음의 근육을 동시에 단련하는 완벽한 충전소가 열린 것이다.
1층에 들어서니 먼저 카페 '북앤핏(Book & Fit)'이 보인다. 도서관과 체육 시설이 복합된 공간이다 보니 카페 이름도 그렇게 지었나 보다. 널찍한 카페에서 한가로이 책장을 넘기는 주민들의 여유가 마음을 편하게 한다.
지혜와 소통의 언덕, '책마루'
도서관의 하이라이트 공간- 책마루 (사진 = 김희연)
3층으로 올라가면 이 건물의 백미인 거대한 계단형 열람실이자 이 문화센터의 이름이 된 ‘책마루’가 펼쳐진다. 넓은 계단이 5층까지 언덕처럼 오르게 이어져 있으면서도 층마다 통로가 뚫려 있어 3층, 4층, 5층 열람실로 시원하게 연결된다. 어느 층에 있더라도 걸음을 돌리다 보면 자연스레 책마루로 다시 오게 된다.
엘리베이터나 닫힌 문으로 층을 이동하며 단절되기 쉬운 현대 건축의 한계를 허물고, 시선이 향하는 어느 곳이나 책으로 연결되는 자유로운 독서의 언덕을 만들어냈다. 계단에 편히 걸터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 3·4·5층의 다른 공간에서 책마루로 불쑥 들어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이 공간이 닫혀있지 않고 다 같이 모이는 기분 좋은 언덕임을 알려준다.
사서들의 다정한 기획이 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
건축의 파격과 세련됨도 훌륭하지만,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방문객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사서들의 기획'이었다. 특히 두 곳의 기획 전시는 눈길을 확 끌었다. 하나는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전시, "요즘 그만둔 것이 있나요?" 다. 하다 그만둔 것들, 읽다 만 책들, 아직 못한 것들을 주제로 글과 소품이 걸려 있다. 그 앞을 걷다가 마지막 문장이 걸음을 붙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낸 일을 기억하나요?” 그 질문 앞에서 잠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다시 걸으려 할 때 이 전시의 백미인 “나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낸 일'을 적어주세요"라는 코너가 나온다. 그곳에 누군가 적어놓은 문장이 가슴을 쿵 하고 울린다.
"나는 나의 노력이 좋다. 내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여리고 귀해서, 누구도 우습게 여기거나 멋대로 내려다볼 수 없다. 자주 애틋하고 뭉클하다. 이따금 견딜 수 없을 만큼 기특한. 넘어지면 부끄러워 한참을 엎어져 있다 또 별것 아니라는 듯이 주섬주섬 일어나 걸었다. 누군가의 손가락질이 꽤 따끔거릴 때가 있었지만, 어떤 형태로든 나는 나아갔다."
펜 글씨의 이 문장은 마치 그곳을 지나는 모두의 등을 따뜻하게 쓸어주며 "괜찮으니, 네가 해낸 노력을 기억하며 나아가라"고 응원하는 것 같았다.
자세히 들여다 보게 하는 질문: 요즘 그만둔 것이 있나요? (사진 = 김희연)
근심을 하얗게 빠는 '마음 세탁소'
또 다른 기획은 우리의 마음을 씻어주는 '마음 세탁소' 였다. ‘세탁소'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들이 전시되어 있고 그 옆에는 <마음 세탁소>라는 주제로 "하늘로 날리고 싶은 고민과 걱정을 적어주세요"라는 안내문이 보였다. 걱정을 적을 티셔츠 모양의 메모지와 '빨래집게'가 수북이 놓여 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메모를 빨래처럼 널어 뒀다.
학생들은 "특목고 입학", "전교 1등" 같은 무거운 목표들이 적혀 있고, 어른들은 "전쟁 좀 그쳐라. 유가, 주가, 물가 다 안정되게", "전쟁으로 주식이 아픕니다. 200만 전자 갔으면 좋겠어" 같은 팍팍한 현실의 바람이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내 시선을 오래 머물게 한 티셔츠 한 장이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은 느린데, 미워할 땐 열정적이 된다. 가족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참 솔직한 빨래들. 이제 그 고민을 널었으니, 마음 세탁소를 연 분들의 바람처럼 우울한 마음이 가볍고 깨끗해지기를 바란다.
마음 세탁소에는 고민이 적힌 빨래들이 걸려있다. (사진 = 김희연)
건물 디자인과 책마루 같은 공간도 좋지만 이 도서관을 진짜 명품으로 만드는 것은 주민들의 삶과 마음을 어루만지려는 사서분들의 다정한 노력인 것 같다. 어떤 훌륭한 책을 읽은 것보다도, 이 기획의 공간들이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으니 말이다.
낡은 동네가 화려한 신길뉴타운 아파트 숲으로 천지개벽하는 동안, 주민들이 가장 목말라했던 '문화 공간'의 역할을 위해 태어난 곳.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아도, 해낸 것들을 생각하며 힘내라 응원하고 미워하는 마음에 괴로웠던 오늘을 하얗게 세탁을 해주겠다는 마음이 있는 곳. 신길 책마루 문화센터, 참으로 다정하고 따뜻한 동네의 '마음 세탁소'를 만났다.
김희연
은 기업전략 컨설턴트다. 씨티은행과 유수 증권사의 IT애널리스트를 거쳐 LG디스플레이 최고전략책임자(CSO)에 올랐다. 금융·증권·IT·제조 분야를 아우르는 경험을 바탕으로 전략· MI·신사업 발굴·IR을 총괄했다. 퇴임 후엔 AI를 통해 현자·석학들과 대화하며 차별화 전략·리더십 해법을 탐색하는 <AI스토밍(AI-Storming) 방식> 을 창안, 관련 저작권을 갖고 있다. 현재는 이 독창적 AI활용 방법론을 기반으로 기업과 기관에 <전략 컨설팅> 및 <AI 강의> 등을 하고, 뉴스버스에 'AI시대 인(人)사이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공감지능시대>와 최근 출간된 <리더는 AI에게 질문하지 않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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