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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매경이코노미스트] 위험한 추경

6년째 버는 것보다 많이 쓰는 가정이 있다고 해보자. 빚은 해마다 쌓이고, 곧 대학에 들어갈 자녀와 부양이 필요한 노부모가 있기에 앞으로의 지출도 줄기 어렵다. 그런데 올해 뜻밖의 성과급이 들어왔다.

[매경이코노미스트] 위험한 추경

반도체 호황에 세수 급증

정부, 만성 재정 적자에도

26조 추경으로 소비 진작

AI 이후 고용충격 클 텐데

노동시장 변화에 대비해야

오지윤 명지대 경상통계학부 조교수

6년째 버는 것보다 많이 쓰는 가정이 있다고 해보자. 빚은 해마다 쌓이고, 곧 대학에 들어갈 자녀와 부양이 필요한 노부모가 있기에 앞으로의 지출도 줄기 어렵다. 그런데 올해 뜻밖의 성과급이 들어왔다. 이 돈을 당장의 소비에 쓸 것인가, 아니면 빚을 줄이고 앞으로 닥칠 더 큰 지출에 대비할 것인가. 한 가정의 일이라면 답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국가 재정에서는 그 당연한 판단이 자주 흔들리는 듯하다.

한국 재정은 이미 그런 처지에 놓여 있다. 통합재정수지는 국민연금·고용보험 등 사회보장성기금까지 포함한 정부 전체의 재정수지인데, 2020년 이후 적자 기조가 이어지고 있다. 재정건전성을 더 잘 보여주는 관리재정수지는 10년 넘게 적자다. 평소 손대지 않는 저축까지 합쳐도 적자이고, 그 저축을 제외한 핵심 살림은 더 오래, 더 깊게 적자라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 세수는 반도체 특수로 크게 늘어날 전망이고, 정부는 26조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했다. 하위 70% 소득자 지원과 유류비 보전 등으로 구성된 이번 추경은 사실상 현재의 구매력을 보전하려는 지출이다. 문제는 미래 지출 부담이 뻔히 커질 만성 적자 구조 속에서, 이렇게 들어온 뜻밖의 세입마저 당장의 소비 보전에 먼저 쓰는 것이 과연 맞느냐는 점이다.

한국 재정이 뜻밖의 '성과급'을 받게 된 배경에는 반도체 호황이 있다. 그러나 반도체 산업은 원래 호황과 불황의 진폭이 큰 대표적 순환 산업이다. 메모리 슈퍼사이클이 이끌었던 2017년의 호황도 2019년 무렵 꺾인 바 있다. 이번 사이클은 AI 투자 붐에 힘입어 더 길어질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더 불안하다. 지금의 호황을 떠받치는 AI 투자가 일단락된 뒤에는, 그 기술이 산업과 일터 전반으로 스며들며 노동시장에 더 큰 구조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오늘의 세수 호황 뒤에 내일의 고용 충격이라는 보이지 않는 위험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AI는 일부 고숙련 직무를 보완하겠지만, 다른 많은 직무는 대체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이중 노동시장 구조상 제도적 보호 바깥의 비정규직과 취약 노동자들이 먼저 충격을 받겠지만, 그 파장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정규직·대기업이라는 좁은 문을 향해 대기 중인 청년 구직자들에게도 그 문은 더 좁아질 수 있다. 지금 대학 진학을 앞둔 자녀가 몇 년 뒤 노동시장에 들어설 때, 그 시장의 규칙 자체가 이미 크게 바뀌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반도체 호황이 가져다준 뜻밖의 세입은 소비쿠폰처럼 흩어질 돈이 아니라, 직무 전환과 재교육, 평생학습, 대학 교육의 질적 전환 등 미래 노동시장 변화에 대비하는 재원으로 배분돼야 한다.

지금의 호황은 미래 충격에 대비할 수 있는 드문 시간이다. 한국갤럽의 4월 둘째 주 조사에서 대통령 직무 긍정 평가는 67%였다. 지지율이 높을수록 단기적으로 덜 인기 있는 결정을 감당할 수 있다. 적자 축소와 구조 전환 대비는 정치적 자본이 넉넉할 때만 추진할 수 있는 과제다. 그럴 때조차 초과세수를 현금성 소비에 소진한다면, 한국 재정이 정치적 경기순환의 유혹에서 벗어날 기회는 또 한 번 놓치게 된다.

프랑스는 그 끝이 어떤 풍경인지를 미리 보여준다. 한때 많은 이들이 선망하던 나라였지만, 부채는 쌓이고 적자는 굳어지면서 이제는 재정위기의 그늘 아래 서 있다. 위기가 닥치면 누구나 긴축을 말한다. 그러나 정작 그때가 되면, 그것을 실행할 정치의 힘은 이미 빠져나간 뒤다. 재정은 한번 무너진 둑과 같아서, 터진 뒤에는 다시 막기가 훨씬 어렵다. 한국은 아직 선택할 수 있는 시간 속에 있다.

[오지윤 명지대 경상통계학부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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