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8월부터 본격 적용되는 유럽연합(EU)의 포장재법(PPWR)에 대비해 독일 식품 유통업계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핵심은 PPWR의 과불화화합물(PFAS) 제한(8월)과 비슷한 시기에 시행되는 비스페놀A(BPA) 사용 금지(7월) 등 강화된 식품포장 안전 규정에 대한 실질 대응 여부다. 수개월 앞으로 다가온 이들 규제는 우리 식품 수출업계에 상당한 도전 과제가 되고 있다.
◆유럽연합(EU)의 PPWR 주요 내용
EU는 2025년 2월 11일, ‘포장 및 포장 폐기물 규정(PPWR)’을 발효시키며 1994년부터 시행하던 ‘포장 및 포장 폐기물 지침(PPWD)’을 전면 대체했다. 지침에서 규정으로 전환되면서 별도의 국내법 입법 없이도 EU 27개 회원국 전역에 직접 적용되는 구속력이 부여됐으며 오는 8월 12일부터 본격 시행된다.
PPWR은 단순한 포장재 재활용 목표를 넘어 포장재의 설계·제조·유통·소비·폐기에 이르는 전 생애주기 관리 체계를 도입한다는 점에서 역대 가장 강도 높은 포장재 규제로 평가된다.
핵심 목표는 네 가지다. 2030년까지 모든 포장을 재활용 가능하도록 설계한다. 포장재 재활용성을 A·B·C 3단계로 평가하는 등급제를 도입하며 재활용 가능 비율 70% 미만으로 어느 등급에도 해당하지 않는 포장은 2030년부터 시장 출시를 금지한다. 2030년부터 플라스틱 포장재에 품목별 최소 10~35%의 재활용 원료 사용을 의무화한다(비PET 접촉 민감 포장 10%, PET 기반 접촉 민감 포장 및 음료병 30%, 기타 플라스틱 35%). 재사용·리필 시스템을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확대 생산자 책임제(EPR)를 강화한다.
식품 분야와 가장 직접적으로 맞닿은 조항은 유해 물질 제한이다. 8월 12일부터 식품 접촉 포장재 내 PFAS 농도가 제한된다(개별 PFAS 25ppb, 합산 250ppb, 전체 50ppm 이하). 또한 같은 해 7월 20일부터는 ‘EU 식품 접촉 물질 내 BPA 및 유해 비스페놀류 사용 제한 규정’에 따라 BPA 사용이 대부분의 식품 접촉 포장재에서 전면 금지된다.
7~8월에 집중된 BPA 금지와 PFAS·PPWR 시행은 사실상 기업들이 늦어도 작년 말까지는 포장재 설계 전환을 완료했어야 함을 의미한다. BPA 프리 포장재는 공급망 전환에 6~18개월이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토마토 가공품, 어류 통조림 등 산성 식품은 대안 소재 개발이 기술적으로 까다로워 조기 준비가 필수적이다.
◆독일의 PPWR 대응 방향
PPWR이 EU 전역에 직접 적용되는 규정이지만 독일은 기존 포장재 시스템과의 정합성 확보를 위해 별도의 국내 이행법을 추진 중이다. 이를 위해 독일 연방환경부는 2025년 11월 ‘포장법 이행법’ 초안을 발표했으며 현행 포장재법을 대체한다.
독일 법률 전문지 글라이스루츠의 분석에 따르면 초안은 이중 시스템, 보증금 반환제, 다회용 풀 등 기존 인프라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PPWR의 새로운 요건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설계됐다.
생산자등록부(LUCID) 등록 요건도 유지돼 8월 이후에도 병행 운영된다. 주요 변경 사항은 재활용 의무 주체 확대로, 기존에는 일부 시스템만 중앙 기관 허가를 받으면 됐지만 앞으로는 모든 제조자와 시스템이 허가를 받아야 한다.
또한 2027년 1월 1일부터 폐기물 감축 재원 마련을 위해 연간 1톤당 5유로를 중앙 기관에 납부해야 하며 2028년부터는 액상 포장재 재활용률 80%, 유리·종이·판지 90%, 플라스틱 75%(2030년 80%) 달성이 의무화된다.
◆기대와 우려 섞인 독일 업계 반응
PPWR에 대한 독일 업계의 반응은 양면적이다. 독일의 순환경제 전문가 카롤리나 슈바익 박사는 PPWR을 “순환경제의 이정표”라 평가하며 “새로운 규정이 기업으로 하여금 혁신을 촉진하고 지속 가능한 포장재 시장을 새롭게 정의하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다회용 포장 스타트업 창업자는 “PPWR는 수십 년간 유지된 일회용 포장 시스템에 대한 명확한 중단 신호”라고 규정하면서 “다회용 포장재에도 일회용과 동일한 재활용 원료 함량 기준이 적용되는 것은 형평성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식품업계 단체인 독일식품산업연합회(BVE)는 지난해 12월 ‘포장법 이행법’ 초안에 대한 공식 의견서를 제출하면서 “폐기물 감축 조직 설립 의무가 지나친 행정 부담을 초래할 수 있다”고 비판하면서 “특히 포장재의 경우 초안의 ‘제조자’와 PPWR의 ‘제조자’ 정의가 달라 이중 부담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동일한 수입 포장재 하나를 두고 독일 내 수입업자와 해외 생산자가 각각 다른 법의 적용을 받아 시스템에 중복 등록하거나 재활용 분담금을 이중으로 납부해야 하는 불합리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독일 식품 바이어의 반응
PPWR 시행을 앞두고 독일 식품 유통업계의 움직임은 예상보다 빠르다. 단순히 규정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선제적으로 소싱 기준을 바꾸고 공급업체에 압박을 가하는 방식으로 시장이 재편되고 있다.
지난해 9월,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개최된 포장재·포장 자동화 전문 전시회(Fachpack)에서 전시장의 최대 화두는 단연 PPWR이었다. 전시 기간 중 개최된 세미나 프로그램과 전시회 전문 매체들의 보도를 살펴보면 재활용 우수 등급 소재로의 전환 가능성, 강화된 규제에 부합하는 적합성 증빙 가능 여부 등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PPWR 대응 요건들이 핵심 의제로 집중 조명됐다.
이는 PPWR 관련 규정 준수 여부가 단순한 권고 사항을 넘어 포장재 소싱의 절대적인 핵심 기준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PPWR 제9조는 2028년 2월 12일부터 내용물, 즉 식품 잔여물과 분리하기 어려워 일괄 퇴비화 처리가 환경적으로 유리한 투과성 티백과 커피백, 과일 부착 스티커 등 특정 품목에 한해 산업용 퇴비화 기준을 의무화하고 있다.
업계는 2028년 시행까지 아직 시간이 있지만 포장재 전환에 원료 조달에서 제조라인 변경, 인증 획득 등 긴 리드타임이 수반된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규정에 맞는 공급처를 조기에 확보하지 않으면 시행 직전 물량 부족 사태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바이어들 사이에서 확산하고 있다.
이 같은 규제 흐름 속에서 티백 필터나 커피백을 수출하는 한국 기업의 경우 비유전자변형식품(Non-GMO) 사탕수수 추출 투과성 필터 소재로 TÜV 오스트리아의 ‘OK 콤포스트 인더스트리얼’ 등 공인 퇴비화 인증을 선제적으로 확보해 유럽 바이어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17년 ‘OK 콤포스트 인더스트리얼’ 인증을 선제 취득한 KOTRA 지사화 참여 기업은 규제 대응 소재를 찾는 유럽 업체들에게 적절한 대안으로 인식되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KOTRA 무역관이 현지 식품 유통 바이어 G사를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이 업체는 8월 PPWR 시행에 대비해 협력사 대상 자체 준수 가이드라인을 수립 중이다. 이는 규정 위반 포장재 유통 시 시장 감시기관으로부터 유통 금지 처분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유통사 차원의 법적 리스크 관리를 선제적으로 강화하려는 조치로 풀이된다.
가이드라인에는 BPA 프리 적합성 선언서(DoC) 제출, PFAS 함량 시험성적서 요구, PPWR 설계기준에 부합하는 포장재 사용 등이 협력사의 이행 항목으로 포함될 전망이다.
이들 요구 사항은 향후 독일 바이어들이 공급망 관리 시 필수적으로 검토하는 공통 항목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앞으로 독일 식품 유통사들이 PPWR 준수 여부를 신규 소싱과 협력사 평가의 기본 조건으로 삼는 추세는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이는 EU 포장재 규제가 단순한 법률 준수의 차원을 넘어 유럽 내 바이어-공급자 간 거래 관계를 결정짓는 핵심 비즈니스 잣대로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독일 바이어가 수출기업에 요구하는 사항
현장의 목소리와 바이어 인터뷰를 종합하면 현재 독일 식품 유통 바이어들이 수입 식품 포장재에 요구하는 사항은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우선 BPA 프리 DoC 제출이다. 오는 7월 20일부터는 제조 공정 내 BPA 사용이 전면 금지됨에 따라 바이어들은 제품 내 BPA 잔류량이 검출 한계치(1μg/kg) 이하임을 입증하는 정밀 시험성적서를 요구하고 있다.
PFAS 제한 기준 충족 증빙도 중요하다. 8월 12일부터 식품 접촉 포장재 내 PFAS 함량은 개별 25ppb, 합산 250ppb, 전체 50ppm 이하로 엄격히 제한된다.
이에 따라 방수 및 방유 코팅이 적용된 포장재를 취급하는 기업들은 즉각적인 소재 재검토가 필요하며 PFAS 미함유를 입증하는 시험성적서 제출이 실제 거래 현장에서 필수 요건이 되고 있다.
특정 품목에 대한 산업용 퇴비화 인증 확보도 빼놓을 수 없다. PPWR 제9조에 따라 2028년 2월 12일부터 티백·커피백 등 투과성 음료 포장재, 과일·채소 부착 스티커, 초경량 비닐봉투(VLPCBs)는 산업용 퇴비화 기준을 의무적으로 충족해야 한다.
이는 모든 포장재가 아닌 특정 품목에 한정된 요건이지만 해당 품목 수출 기업은 ‘OK 콤포스트 인더스트리얼’이나 ‘시들링’ 등 공인 인증을 사전에 확보해 대응할 필요가 있다.
단일 소재 포장재로의 전환 요구도 있다. 독일 포장재 구매 담당자들 사이에서 가장 빈번하게 제기되는 요건 중 하나는 포장재를 단일 소재로 구성해 달라는 것이다.
PPWR의 재활용성 등급 평가에서 다층·복합 소재는 낮은 등급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바이어들은 재활용 효율성 확보를 위해 단일 소재 포장재 사용 여부를 공급업체 선정의 중요한 잣대로 삼고 있다.
PPWR 기준에 부합하는 패키징 설계의 도입이다. 바이어들은 과대포장 금지, 빈 공간 비율 50% 상한 준수 등 PPWR의 기본 설계 요건을 충족하는 포장 방식으로의 전환을 협력사에 강력 요구하고 있다. 특히 일부 대형 유통사들은 이러한 요건을 거래 조건에 명시하거나 공급자 행동규범을 개정해 계약 선결 조건으로 반영하는 추세다.
◆우리 기업 기회 요인과 시사점
EU 포장재 규제의 패러다임 전환은 단기적으로 수출 기업에 행정적, 비용적 부담을 주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기술적 우위를 점한 기업에 강력한 시장 진입 기회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인증과 소재 전환의 선점이 곧 수주의 선점’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고착화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 티백·커피백 등 특정 품목의 경우 2028년 의무화 시행 전 ‘OK 콤포스트 인더스트리얼’ 등 공인 퇴비화 인증을 선제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유럽 바이어의 소싱 경쟁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는 핵심 요소가 될 수 있다. 또한 단일 소재 전환은 이미 실무적인 공급사 선정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어 관련 솔루션을 보유한 한국 기업에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다.
BPA·PFAS 프리 소재 전환 및 객관적 증빙 확보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올해 하반기 본격적인 규정 시행을 불과 몇 개월 앞둔 현시점에서 우리 기업에 주어진 시간은 매우 촉박하다.
식품 접촉 포장재를 수출하는 기업은 즉시 사용 소재의 유해물질 함량을 재검토하고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면 제3자 공인 기관의 시험성적서 확보를 최우선 순위로 진행해야 한다.
특히 하반기 규제 발효 직전 시험 수요가 몰려 성적서 발급이 지연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상반기 안에 모든 기술적 검증과 서류 구비를 완료해야 시행 직후의 수출 중단 리스크를 방지할 수 있다.
현지 수입 파트너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한 사전 점검 역시 필수적이다. 주요 식품 유통사들이 이미 자체 컴플라이언스 매뉴얼을 수립하고 협력사에 준수를 요구하는 만큼 수출 기업은 현지 파트너와의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 특히 규제 당국의 요구 시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기술 문서와 DoC 관리 체계를 조기에 구축해야 한다.
이 소식을 전한 KOTRA 무역관은 “장기적으로 EU의 포장재 규제는 글로벌 표준으로 확산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EU의 포장재 규제 대응을 단순한 비용 지출이 아닌 글로벌 기준에 부합하는 기술 역량 확보의 기회로 삼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KOTRA 브뤼셀·함부르크 무역관 제공
정리=이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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