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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데스크칼럼] 권한 없는 공약, 책임 없는 정치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 끝났다. 길거리와 각 가정에 배달된 공보물은 온통 화려한 청사진으로 도배됐던 기억만 남았다. 수조 원이 드는 광역 교통망 구축, 대규모 국책 사업 유치, 거대한 지역 개발 프로젝트까지.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 끝났다. 길거리와 각 가정에 배달된 공보물은 온통 화려한 청사진으로 도배됐던 기억만 남았다. 수조 원이 드는 광역 교통망 구축, 대규모 국책 사업 유치, 거대한 지역 개발 프로젝트까지. 선거구마다 내걸렸던 현수막과 공약집을 생각해 보면, 당장 내일이라도 우리 동네에 초고속 열차가 뚫리고 거대한 산업단지가 들어설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이 화려한 약속들의 대부분은 실현 가능성이 전무한 ‘권한 밖의 허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시장, 구청장 등 기초자치단체장 후보부터 도의원, 시의원 후보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쏟아내는 공약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실로 가관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내세우는 핵심 공약의 상당수가 자신들의 법적·제도적 권한으로는 결코 진행할 수 없는 사업들이라는 점이다. 국가철도망 구축 계획 반영이나 고속도로 신설 등은 엄연히 중앙정부의 고유 권한이다. 수천억 원이 투입되는 대규모 개발 사업 역시 중앙정부의 재정 지원 없이는 첫 삽조차 뜨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선거 후보자들은 앞다퉈 ‘내가 해내겠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법적으로 편성 권한도, 최종 결정권도 없는 이들이 중앙정부의 계획을 마치 자신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포장해 유권자를 현혹하는 행태는 이제 지방정치의 고질병을 넘어 하나의 관행으로 굳어졌다.

단체장 후보들의 월권 공약도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감시자가 돼야 할 도의원과 시의원 후보들마저 이러한 ‘묻지마식 개발 공약’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방의회 본연의 임무는 자치단체가 수립한 예산을 심의·의결하고, 행정을 감시하며, 주민의 삶을 보듬는 조례를 제정하는 것이다. 엄연히 법적으로 예산 수립 권한이나 집행 권한이 없다. 즉, 의원 개인의 힘으로는 도로를 뚫거나 대형 병원을 유치하거나, 광역 교통망을 끌어올 수 없다. 예산의 편성권은 전적으로 자치단체장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선거에서 도의원·시의원 후보들의 공보물은 시장 후보의 그것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닮아 있었다. “OO선 전철 유치 조기 착공”, “대규모 테크노밸리 조성” 등 거대 담론들이 동네 시의원 후보의 입에서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당선되면 당장 예산을 끌어와 사업을 집행할 수 있는 것처럼 큰소리를 치는 것은 유권자에 대한 명백한 기만이다.

이들이 자신의 권한을 넘어선 비현실적 공약을 남발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유권자들을 사로잡기에 이보다 더 효과적인 처방전이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유권자들은 여전히 ‘부동산 자산 가치 상승’과 ‘교통 인프라 확충’에 극도로 민감하다. “우리 동네에 전철역이 들어선다”, “우리 지역이 개발된다”는 공약은 표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민생을 돌보는 조례 제정이나 낭비되는 예산을 감시하겠다는 약속으로는 유권자의 표심을 잡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결국 내실 있는 정책 대결 대신, ‘포퓰리즘 공약 경쟁’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면 지방자치의 근간이 흔들린다. 지방의회의 책무인 건강한 견제와 감시는 불가능해진다. 정작 주민들의 삶에 직결되는 생활 밀착형 행정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지방자치의 실종이자, 풀뿌리 민주주의의 퇴행이다.

이제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권자들의 냉철한 안목과 감시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현수막의 화려한 문구에 흔들리기 전에, 공보물에 적힌 약속이 과연 그 후보의 ‘체급’과 ‘권한’에 맞는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 시의원 후보가 광역 교통망을 뚫겠다고 공언한다면, 그것이 과연 조례 제정과 예산 심의라는 의원의 권한으로 가능한 일인지 질문해야 한다. 시장 후보가 수조 원짜리 프로젝트를 던진다면, 재원 조달 계획과 중앙정부와의 협의 방안이 구체적으로 마련돼 있는지 꼼꼼히 검증해야 한다. 정치인의 거짓 약속을 걸러내고 지방자치의 격을 올리는 최종 책임은, 결국 투표소로 향하는 유권자들의 손끝에 달려 있다.

최용진 뉴스콘텐츠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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