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현 부국장
지금은 인공지능(AI)이 기사를 쓰는 시대다. 증시 시황이나 스포츠 경기 결과 같은 단순 사실은 이제 인간 기자의 손을 거치지 않는다. 생성형 AI는 수초 만에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문장으로 정리해 내고 심지어 독자의 선호도에 맞춰 기사 어조까지 바꾼다. 정보가 범람하는 AI 시대에 우리 사회는 근본적인 질문을 마주하고 있다. “인간 언론인은 여전히 필요한가?” “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언론이 지켜야 할 진짜 역할은 무엇인가”
현재 우리가 마주한 가장 큰 위기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너무 많은 정보와 그 속에 섞인 ‘정교한 거짓말’이다. AI는 놀라운 속도로 텍스트를 생산하지만 동시에 그럴싸한 오정보를 진짜처럼 생성해내고 딥페이크를 통한 여론 왜곡의 무기가 되고 있다.이러한 환경에서 언론인이 지녀야 할 첫 번째 자세는 ‘철저한 회의주의와 검증의 게이트키퍼(Gatekeeper)’가 되는 것이다. 예전의 게이트키퍼 역할이 뉴스 가치가 있는 사건을 골라내는 것이었다면 AI 시대의 게이트키퍼는 넘쳐나는 정보의 바다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걸러내는 여과기 역할을 해야 한다.
단순히 남들보다 빠르게 받아 적는 속보 경쟁은 이제 의미가 없다. AI를 이길 수 없는 속도 전쟁 대신 언론은 ‘정확성’이라는 독점적 가치에 집중해야 한다. 팩트체크는 언론인의 생존 전략이자 신뢰를 담보하는 마지막 보루다. 정보가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대중의 불안을 해소하고 “이 매체의 보도라면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야말로 AI 시대 언론이 증명해야 할 첫 번째 존재 이유다.
AI는 과거의 데이터와 패턴을 학습해 미래를 예측하거나 현재를 정리한다. 하지만 인간의 삶과 사회적 갈등은 언제나 데이터화할 수 없는 영역이다. 수치화된 통계 뒤에 숨겨진 소외된 이들의 눈물, 자본과 권력의 복잡한 역학 관계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 이면의 의도, 법과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는 알고리즘의 레이더에 걸리지 않는다. 여기서 언론인의 두 번째 역할인 ‘맥락의 제공자이자 심층적 탐사자’로서의 임무가 시작된다.
기사는 단순히 일어난 일을 서술하는 데 그쳐선 안 된다. 이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우리 사회에 어떤 구조적 모순이 얽혀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 깊이 고찰하는 ‘맥락적 저널리즘’이 필요하다. 현장을 발로 뛰며 냄새를 맡고, 눈빛을 교환하고, 행간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 언론인뿐이다. 데이터의 이면을 파헤치는 집요한 탐사보도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긴 저널리즘은 AI가 흉내낼 수 없는 인간 저널리스트의 고유 영토다.
AI 시대의 언론인은 단순히 기술의 관찰자가 아니라 기술을 활용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기사 작성 보조, 자료 조사, 데이터 시각화 등 AI는 언론인의 훌륭한 비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기술이 편리해질수록 그것을 다루는 인간의 윤리적 책임감은 더 무거워져야 한다.
취재 과정에서 AI를 사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저작권 침해 문제, 특정 데이터 학습으로 인한 편향성의 무비판적 수용, 개인정보 침해 가능성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도구의 편리함에 매몰돼 취재원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소홀히 하거나 AI가 요약해 준 텍스트를 검증 없이 복사해 붙여넣는 태도는 언론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행위다.
따라서 AI를 도구로 영리하게 활용하되 저널리즘의 핵심 가치인 공정성, 객관성, 인간 존엄성에 대한 가치는 타협하지 않는 ‘윤리적 나침반’을 가슴에 품어야 한다.
AI 시대 언론의 마지막 역할은 ‘건강한 공론장의 복원’이다. 확증 편향을 자극해 조회수를 올리는 자극적인 옐로 저널리즘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목소리가 안전하게 소통하고 토론할 수 있는 광장을 제공해야 한다. 복잡한 사회적 대립 속에서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하고 갈등을 격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합리적 의제를 설정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AI의 홍수 속에서 언론의 미래를 비관하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정보의 가치가 땅에 떨어질 때 ‘진짜 정보’를 찾아내고 정제하는 저널리즘의 가치는 귀해진다. 기술이 아무리 진화해도 사회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용기, 약자의 편에 서는 정의감, 인간에 대한 깊은 공감 능력은 알고리즘에 코딩될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언론인은 AI보다 글을 빨리 쓰는 기자가 아니다. 기술의 편리함을 다룰 줄 아는 지혜를 갖추고 현장의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한 걸음 더 내딛는 기자, 기사 한 줄이 사회에 미칠 파장을 고민하며 밤을 지새우는 책임감 있는 언론인이다. 범람하는 AI 시대, 언론의 길은 결국 더 철저하고, 더 깊이 있는 ‘인간 저널리즘’의 본질로 돌아가는 데 있다.
임상현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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