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금융위원장(자료=금융위원회 홈페이지)
3월 정기 주주총회 시즌을 앞두고 눈에 띄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전직 금융위원장 두 분이 대기업 사외이사를 맡는다는 소식인데요. 주인공은 제6대 최종구 위원장과 제8대 고승범 위원장. 올해부터 한진칼과 SK하이닉스에서 각각 사외이사 업무를 수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로써 퇴임 후 국내 대기업 경영에 관여하는 전직 금융위원장은 총 3명이 됐습니다. 제4대 신제윤 위원장은 2024년 삼성전자의 사외이사에 선임된 데 이어 작년부터는 이사회 의장직을 수행 중입니다. 제3대 김석동 위원장이 6년 만에 한진칼 이사회에서 물러났지만, 후배 위원장 두 명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현역 사외이사는 지난해 2명에서 올해 3명으로 늘었습니다.
4·6·8대 3명의 전직 금융위원장이 현역에서 활발히 활동한다는 소식을 접하니 문득 다른 위원장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궁금해졌습니다. 금융감독위원회 시절(1998~2007년)을 뺀 순수 금융위원회 수장은 총 10명입니다. 윤석열 정부에서 활약한 김주현 위원장(9대)과 김병환 위원장(10대)의 경우 취업제한 기간(3년)이 끝나지 않았으니 1·2·3·5·7대 위원장만 파악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제1대 전광우 위원장은 2013년 설립된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설립자인 사공일 이사장(전 재무부 장관)의 뒤를 이어 2019년부터 8년째 이사장 직을 수행 중입니다. 제2대 진동수 위원장과 제7대 은성수 위원장은 법무법인 김앤장법률사무소의 고문으로 활약 중입니다. 제3대 김석동 위원장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최근까지 한진칼 이사회에서 활동하다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로 복귀했고, 제5대 임종룡 위원장은 올해 우리금융그룹 회장 연임에 성공했습니다.
제1~8대 위원장이 모두 일선 경영 현장에서 맹활약 중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9~10대 김주현·김병환 위원장도 취업제한 기간이 끝나면 로펌이든 어디든 재취업이 확실시되니 전직 금융위원장을 향한 구애의 손길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6년 전 김석동 위원장이 한진칼 사외이사를 맡을 때만 해도 금융관료가 금융 테두리를 벗어나 산업자본의 영역에 속하는 일은 특이한 케이스로 안팎에선 받아들였습니다. 은행, 증권, 보험 등 금융권에도 재취업 일자리가 넘치는데 굳이 재벌 계열 대기업에 둥지를 틀 유인이 크지 않았던 것이죠.
하지만 김석동 위원장의 활약상이 업계에 긍정적으로 전파된 것인지 2024년에는 대한민국 1등 기업 삼성전자가 신제윤 위원장을 영입합니다. 삼성전자는 ‘금융·재정 전문가’로서 회사의 자금 운용과 글로벌 전략에 전문적인 조언을 해줄 인물이라고 선임 배경을 밝혔습니다만, 일각에서는 다른 해석도 나옵니다. ‘삼성생명법’ 등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책·입법 리스크에 대비하려는 포석이라는 시각입니다. 신제윤 영입 효과가 힘을 발휘한 것일까요. ‘삼성생명 일탈회계’ 등 여러 부정적 이슈에도 불구하고 2024년부터 현재까지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에는 별다른 변화의 기미가 없습니다.
김석동 위원장이 길을 뚫고 신제윤 위원장은 길을 넓히면서 최종구·고승범 위원장까지 산업계에 발을 디뎠습니다. 최종구 위원장은 김석동 위원장의 후계자에 가깝습니다. 대한항공 조원태 회장에게 김석동 위원장은 그룹을 위기에서 건져준 은인에 가깝습니다. 경영권 분쟁을 극복하고 아시아나항공 인수합병이라는 대사가 거의 완료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아직 안심하기엔 이릅니다. 최장 임기 6년을 소진한 김석동 위원장은 문재인 정부 초대 금융위원장 출신인 최종구 위원장에게 ‘대한항공 경영 안정’이라는 미션의 바통을 물려준 것으로 업계에선 해석하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 역시 그 어느 때보다 정권과 금융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수요 폭발로 글로벌 구매자들이 줄을 설 정도로 호황이지만 반도체 외 다른 사업 부문은 구조조정이 불가피할 만큼 실적이 신통치 않습니다. 반도체 사업 또한 호황을 최대치로 누리려면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데 정부의 도움 없이는 자금 조달마저 만만치 않습니다. 게다가 지난해 벌어진 세기의 이혼 소송으로 지배구조는 큰 타격을 입을 뻔한 상황까지 치닫기도 했습니다. 지주회사 체제에서 그룹의 핵심 회사인 SK하이닉스가 손자회사 지위여서 SK그룹에 지배구조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고 위원장의 사외이사 선임 배경에 대해 “금융위원장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을 지낸 금융·경제 정책 전문가로서 감사 업무와 재무 전략, 중장기 의사결정에서 기여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 이상의 역할을 내심 기대 중일 것이란 해석이 그룹 안팎에서 흘러나옵니다.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금융위원장 출신으로서 그룹 경영 및 지배구조와 관련해 이재명 정부의 당정청과 긴밀한 소통을 주문받지 않았겠느냐는 시각입니다.
고위공무원의 가치는 비단 개인 차원에 머물 순 없습니다. 유·무형의 국가적 에너지가 투입된 공적 자산이기도 합니다. 나라 경영의 노하우가 응축된 우수 인재를 정년이 다 찼다고 내팽개치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자 낭비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활용할 가치가 높다면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국가에도, 기업에도 이로운 일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행정고시까지 패스한 국가적 인재가 퇴직 후 공무원연금만 바라보며 박봉을 견뎠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로펌 고문, 대기업 사외이사 등 퇴직 후 보상에 대한 기대심리로 이곳저곳 머리를 조아려가며 묵묵히 임무를 수행한 이들도 상당수였을 것입니다. 그런 기대마저 할 수 없다면 민간으로의 이직이 활발해지면서 공직 사회의 질적 수준을 담보하기조차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일정 정도의 ‘퇴직 후 보상’은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보상 수준을 너무 높게 잡은 나머지 사익만 지나치게 추구해 공익을 해치는 상황까지 벌어지면 어쩌나 하는 점은 우려스러운 부분입니다. 고위공무원은 공직을 30년 이상 수행한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대화를 나눠 보면 생각이나 행동 모두 공익이 몸에 밴 분들입니다. 그럼에도 기업이나 로펌이 아무런 기대나 대가 없이 자동차와 사무실, 개인 비서와 법인카드를 지급하진 않습니다. 아무리 공익이 몸에 배어있다 해도 기업의 기대치에 일정 정도 부합할 수밖에 없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퇴직 후 공익과 사익의 균형을 찾아가는 일일 것입니다.
정답이 있진 않습니다. 사익을 위해 공익을 얼마나 해쳤는지도 사실 본인만 알고 아무도 모를 가능성이 큽니다. 퇴직 후의 삶은 언론, 국회 등 여러 감시자의 눈에서도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판’은 무섭습니다. 신뢰는 쌓기는 힘들어도 무너지는 건 한 순간입니다. 사익에 심취해 스스로 무너뜨린 평판은 내가 몸담았던 공직과 후배들에게도 영향을 끼칩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공직에 있는 후배들은 묵묵히 박봉을 견디고 있습니다. 퇴직한 고위공무원 분들이 ‘선을 넘지 않는’ 균형 감각을 보여줘야만 우리 사회에 ‘퇴직 후 보상의 건전한 선순환’은 이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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