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에너지 대혁명, 인간 의식이 바뀌는 시대
정부 R&D·AI 투입 예산 45조 이상, 기존 방식 안돼
미·중 과기 전쟁 속 지금 기회 놓치면 기회 없어
제네시스 미션·반석 포르젝트 사이 한국 K-문샷
이경수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의 연일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AI가 가져올 변화와 미중 과학기술 전쟁 속 한국이 이를 인식하며 위기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이경수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이 연일 광폭 행보다. 서울과 대전을 거의 매일 오간다. 출연연 연구진과 노조, 정부위원회, 제조현장, 정부부처까지 현장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편한 자리보다 불편한 자리를 먼저 찾는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 인애이블퓨전 의장으로 역할이 큰 그가 이토록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유는 하나다. AI 대혁명과 에너지 대전환이 동시에 몰려오는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두 번의 기회가 없다는 위기의식이다. 이제까지의 산업혁명이 인간의 근육과 감각을 대신하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의 AI는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여겼던 추론과 인지 자체를 넘보고 있다. 인류가 한 번도 맞닥뜨린 적 없는 전환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냉전 시대 맨해튼 프로젝트처럼, 지면 무조건 지는 전쟁 상황처럼 말이다.
이 부의장은 지난 18일 출연연구발전협의회총연합회(회장 김진수 한국화학연구원, 이하 연총) 관계자들과 서울에서 간담회를 가졌고, 19일 오전 7시에는 대전 대덕연구개발특구기관장협의회(회장 박장현 한국천문연구원장, 이하 연기협) 혜윰 포럼에서 'AI 시대 과학기술혁명의 새로운 여명'을 주제로 발표에 나섰다. 오전 일정을 마치자마자 그는 곧장 오송으로 향했다. 강행군이지만 그의 표정에는 피로보다 절박함이 먼저 읽혔다.
이날 혜윰 포럼에 참석한 출연연 기관장들은 이 부의장의 위기 강조에 공감을 표하며 "급변하는 시기에 위기를 인식하고, 바꿔가기 위해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 손발의 혁명을 넘어, 인간의 '혼'이 바뀐다
이 부의장은 현재의 변화를 규정하는 데 있어 단호하다. 문재인 정부 혁신본부장 시절 4차 산업혁명 정책을 설계했던 그가 지금의 AI 전환을 그 연장선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제까지 있었던 모든 혁명은 우리의 근육이나 손발의 힘, 귀나 눈 같은 센서를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닥치는 일들은 우리의 인식, 마음, 혼을 바꿀지도 모릅니다."
그는 인공일반지능(AGI), 더 나아가 초인공지능(ASI)의 도래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짚었다. 전문가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가능성이 높고 멀리 있지 않다"고 봤다. 일론 머스크가 2030년을 AI가 인류를 초월하는 시점으로 언급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도 "그 정도 되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그날이 오기까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신호"라고 해석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소개했다. AI들이 갑자기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기계어로 서로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순간이 진짜 위험한 시점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전하는 이 부의장의 표정에는 유머와 긴장감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 미·중 AI 패권 전쟁, 그리고 한국의 좌표
이 부의장이 현장을 누비며 가장 자주 꺼내는 이름이 있다. '제네시스 미션'이다. 지난해 11월 미국 에너지부가 대통령 행정명령으로 발동한 이 국가 프로젝트는 AI가 스스로 과학적 발견을 수행하는 자율 실험실 구현을 목표로, 구글 딥마인드·엔비디아·마이크로소프트 등 24개 빅테크 기업이 총집결한 사실상의 전시 체제다.
제네시스라는 이름은 유대·기독교 문화권에서 '창세기'를 뜻한다. 이 단어를 국가 프로젝트 이름으로 내건 것은 이례적이다. 단순한 기술 개발을 넘어 새로운 문명의 출발을 선언하는 무게가 담겨 있다는 방증이다.
미국이 이처럼 서두른 데는 이유가 있다. 중국이 먼저 움직였다. 중국은 AI를 국가 과학 연구 전반에 적용하는 '반석 프로젝트'를 가동했고, 미국은 이에 맞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중의 과학기술 전쟁의 시작인 것이다.
이 부의장이 주목하는 것은 대응의 속도가 아니라 구조다. 구글 딥마인드는 제네시스 미션 이전부터 이미 알파폴드로 단백질 구조 예측에 성공해 노벨 화학상을 받았고, 알파지놈은 유전체 해독, 알파퓨전은 핵융합 제어를 향해 가고 있었다. AI가 개별 분야를 넘어 과학적 발견 자체의 엔진이 되는 구조가 민간에서 먼저 완성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제네시스 미션은 그 흐름을 국가 차원에서 결집한 것이다.
"미국은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내리자 24개 AI 기업이 한꺼번에 국가 연구소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는 공공 데이터가 많다고 하지만, 그 데이터를 국가 목적으로 어떻게 쓸지에 대한 논의부터 시급합니다."
이 부의장은 여기서 한국의 좌표를 짚는다. 미국은 혁신과 자본, AI 역량은 있지만 제조 기반이 무너졌다. 배 한 척 제대로 고치기 어려운 나라가 됐다. 반면 중국은 제조와 데이터를 모두 쥐고 있지만, 전략적 경쟁 구도 속에서 민주주의 진영은 중국산 제조를 대체할 파트너가 절실하다. 그는 "그 자리에 들어올 수 있는 나라가 사실상 한국뿐"이라고 분석했다.
K-문샷이 여기서 출발한다. 이 부의장은 K-문샷을 단순한 정부 브랜드 사업으로 보지 않는다. 제네시스 미션의 한국 버전으로, 우리가 가진 가치를 지키면서 미국과 함께 가는 전략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만 반도체·배터리 등 우리가 앞서 있는 분야는 굳이 협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선을 그었다.
◇ "대덕단지, 편안하고 따뜻한 그 편안함이 문제"
문제는 과학계가 이 전환의 무게를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느냐다. 이 부의장은 혜윰 포럼에서 대덕단지의 현주소를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대덕단지가 편안하고 따뜻합니다. 그런데 그 편안함이 문제입니다."
그는 AI 시대의 변화를 과거 성장동력 프로젝트의 연장선으로 바라보는 순간 정부R&D 예산 35조 5000억 원은 잘못 쓰이게 된다고 경고했다. K-문샷이라는 이름을 달았다고 해서 '저기 줄 서면 돈이 나오겠네'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틀렸다는 것이다.
연총 간담회에서도 같은 맥락의 발언이 이어졌다. 그는 구윤철 부총리가 "700조 중 45조 5000억 원을 과학계에 투자했으니 뭔가 나오게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예산을 뺐다 줬다 하면서 성과를 바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라고 정부 측에도 불편한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국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연구단지가 누구보다 먼저 위기의식을 갖고 더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반문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 "우리 명장들의 몸속에 체화된 데이터가 AI 시대의 핵심 자산"
이 부의장이 한국의 기회로 가장 주목하는 것은 제조업이다. 미국이 AI 기반 무인공장으로 제조업 부활을 꿈꾸지만 정작 제조 현장의 데이터가 없다. 수십 년간 쌓인 그 데이터가 한국 명장들의 몸속에 체화돼 있다는 것이다.
핵융합 분야가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선례다. 미국이 제네시스 미션에 한국과의 핵융합 협력을 제안한 것은 한국이 17년간 KSTAR를 운전하며 쌓아온 데이터와 살아있는 장치 때문이다. 미국은 딥마인드, 엔비디아와 함께 AI 시뮬레이션 역량은 갖췄지만 실제 데이터를 생산할 장치가 없다. 한국은 그 반대다.
"제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장들이 가진 체화된 현장 데이터는 AI 시대의 핵심 자산입니다. 중국보다 나은 게 바로 그겁니다."
문제는 그 데이터를 어떻게 AI로 옮기느냐다. 명장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노하우를 넘기는 순간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현실적 우려가 있다. 사회적으로도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다. 이 부의장은 이 난제를 현실로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하나씩 길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핵융합 전문가 출신인 그는 AI와 에너지의 연결고리도 분명하게 본다.
"AI 데이터센터는 20세기 에디슨이 세운 발전소와 같습니다. AI에 필요한 전력을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AI G3 국가가 되느냐 못 되느냐를 가릅니다."
재생에너지, SMR, 핵융합을 망라한 실용주의적 에너지 전략이 필요한 이유다. 그는 "에너지를 이념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에는 절대 반대한다"고 못 박았다.
인구 문제도 피하지 않았다. 100만 명 출생 시대에서 25만 명대로 급감하는 추세 속에 "15년 후 연구단지에 들어올 인재가 75만이나 줄어든다. 연구비가 아무리 있어도 사람이 없으면 소용없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피지컬 AI와 로봇이 현실로 들어오는 이 시기를 현명하게 활용하면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다. 쉽지는 않지만, 가능성이 생겼다"고 했다.
◇ 연총과의 대화, 그리고 과학계를 향한 쓴소리
이경수 부의장은 18일 연총 회원인 연구진과의 미팅을 갖고 현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연구진의 이야기에 공감을 표하면서도 연구진 스스로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사진= 출연연구발전협의회총연합회]
연총과의 간담회에서는 현장의 날 선 목소리를 두루 들었다. 연총 측은 기관장 선임 시 내부 구성원들이 후보자의 경영 철학을 들을 기회조차 없다며 제도적 장치 마련을 요구했고, 기관장 공석이 길어지는 것에 대한 우려도 쏟아냈다.
이 부의장은 "연구자들의 목소리를 담을 공식 소통 채널의 필요성에는 공감한다"면서도 "직선제 방식의 과도한 민주주의는 파벌 싸움이나 선심성 공약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경계했다. 기관장 공석 문제에 대해서는 "계엄 등 국가적 비상 상황으로 인해 검증 프로세스가 밀려 늦어지고 있는 현실"이라고 솔직하게 설명했다.
연총이 PBS(과제중심제도) 폐지 이후 연구 현장의 혼란을 호소하자 "일단 자르고 새 체제를 만들어가는 출애굽 과정"이라고 비유하며 "연구자들이 합리적인 대안을 직접 만들어 가져오면 정부와 청와대에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자문회의 심의를 유튜브로 생중계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관료들의 독단적 결정을 막는 투명성 장치로서의 의미였다.
과학기술계를 향한 쓴소리도 이어졌다. 그는 "기관장이 관용차를 줄지어 타고 다니는 모습이 국민에게 어떻게 보이겠냐"며, 본인은 청와대 공식 행사가 아니면 배낭을 메고 지하철을 탄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덕연구단지의 가장 큰 동력은 국민의 지지라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연총 관계자가 "기관장들을 만나도 출연연 내부 고민에만 머물 뿐, 국가 방향이나 대덕단지 원팀에 대한 공감대가 별로 없다"고 지적하자, 이 부의장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라면서도 자신의 방식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내가 먼저 변해야 옆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생각이 다른 사람, 상처받은 사람들을 먼저 찾아다닙니다."
그는 "편한 사람끼리 모여서 밥 먹으면 동감만 하다 끝난다. 이 시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 불평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힘이 모인다"고 역설했다. 힘을 모으는 것은 정치적 방향이 아니라, 다양한 세대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함께 끌고 갈 것이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류석현 한국기계연구원장이 창원·구미 산단의 노후화와 고령화를 언급하며 "한국의 골든타임이 얼마나 남았느냐"고 묻자 이 부의장은 차분하게 답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헐레벌떡 하면 더 잘못됩니다. 급할수록 차분하게, 구체적인 액션 하나씩을 해야 합니다."
그는 국제핵융합실험로(ITER)를 이끌며 '슈퍼 갑'이었던 자신이 핵융합 상용화 회사를 창업한 뒤 투자자 앞에서 '을'이 돼본 경험을 꺼냈다. 그는 "거대담론이 아니라 하나라도 구체적인 것을 가져가야 상대방 얼굴이 밝아지더라. 지금 한국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데이터가 있다고 하지만 막상 가보면 없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현실도 짚었다. 그 현실에서 하나씩 해결해 나가다 보면 방법이 구체화되고, 작은 성공이 쌓여야 변화가 퍼져나간다는 메시지였다.
이날 이 부의장은 "위기를 위기로 봐야 기회가 온다. 위기의식이 대덕연구단지에 공유돼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 부의장의 발표에 기관장들도 공감을 표했다. 이호성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은 "AI가 몰고올 변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었는데, 오늘 이 부의장의 이야기에서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며 "오늘 기관에서 창업 간담회가 있었다. 위기 속에서 우리도 적극적으로 바뀌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기관마다 해야 할 분야를 정하고 하나씩 실행에 옮기는 데 속도를 낼 것"이라고 덧붙였다.
권석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장도 위기의식 공유와 불편함 감수에 공감하며 "내부에서도 위기 인식을 공유하고 의견을 들어 방향을 만들어 가고 있다. 분기별로 자리를 마련해 정책적으로도 꾸려 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장현 연기협 회장(한국천문연구원장)은 "급변하는 시대에 대덕연구단지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고민해야 할 화두를 제시해준 강연이었다"며 "올해 50주년을 맞는 연기협도 이러한 변혁을 준비하는 데 일조하겠다"고 말했다.
이 부의장은 1991년 MIT에서 귀국해 35년을 대전에 살며 연구단지와 함께 해온 과학자이다. 이 시기를 '인류가 한 번도 맞아본 적 없는 전환점'이라고 보는 그의 광폭 행보는 당분간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혜윰 포럼에 참석한 정부출연연구기관 기관장들도 위기 인식에 공감을 표했다.[사진= 대덕연구개발특구기관장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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