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반
“다른 건 못 입겠다”…송혜교·손석구도 반한 15만원짜리 티셔츠 [비크닉]
중앙일보
할머니 될 때까지 입을 수 있다. 소재나 핏이 좋아서 다른 면티를 이제 못 입겠다.
언뜻 보면 아무런 개성 없어 보이는 무지 티셔츠에 대한 간증이 이어진다. 모델 출신 방송인 홍진경이 유튜브 채널 ‘공부왕찐천재’에서 한 브랜드의 티셔츠를 색깔별로 10벌씩 가지고 있다며 건넨 이야기다.
제임스 펄스의 브랜드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면 티셔츠.사진 제임스 펄스 홈페이지
티셔츠 한장으로 멋을 낼 수 있는 여름이다. 그런데 티셔츠라고 다 같은 티셔츠가 아니다. 여기 로고도 없고, 무늬도 없고, 장식도 없는 티셔츠 한장이 조용히 입소문을 타고 있다. ‘부자들의 유니클로’ ‘티셔츠계의 에르메스’로 불리는 브랜드, 제임스 펄스(James Perse) 얘기다.
b.멘터리
기본 티셔츠에서 최고급을 논하다
199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탄생한 제임스 펄스의 간판 상품은 아무 무늬 없는 티셔츠다. 브랜드의 핵심 철학인 ‘꾸미지 않은 세련됨(low maintenance high fashion)’을 그대로 반영한 제품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펄스의 티셔츠 디자인에는 특별한 점이 없다. 누구나 옷장에 한 벌쯤 가지고 있을법한 기본 티셔츠인데, 입은 사람을 보면 뭔가 다르다. 실제로 과거 한 유튜브 채널에 등장한 배우 손석구가 입은 회색 티셔츠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흐르는 듯한 실루엣과 고급스러운 소재, 특유의 편안함이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고, 이 티셔츠가 제임스 펄스라는 게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 이 외에도 옷 잘 입기로 이름난 방송인 김나영, 인플루언서 차정원, 배우 송혜교 등이 제임스 펄스 티셔츠를 애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임스 펄스의 티셔츠는 옷을 잘 아는 유명인들의 애장템으로 입소문이 났다. 사진 유튜브 홍진경 채널 화면 캡처
문제는 가격이다. 원단에 따라 다르지만, 기본 티셔츠가 13만 원대에서 20만 원대다. 저렴하게는 1만원 미만으로도 무지 티셔츠를 구매할 수 있는 요즘, 티셔츠 한장의 가격치곤 과하다.
제임스 펄스는 가격 장벽을 품질로 돌파한다. 티셔츠 하나를 만들 때도 원단의 무게, 부드러움, 몸에 흐르는 실루엣을 세분화했다. 면섬유를 실로 방적하기 전 특수 가공을 거쳐 부드러움을 극대화한다. 최고급 라인에는 일본산 로터스 저지를 쓴다. 여기에 옷을 완성한 후 통째로 염색하는 ‘가먼트 다이’ 방식과 섬유 유연 처리를 더해 새 옷임에도 첫날부터 오래 입은 것 같은 자연스러운 감촉을 낸다.
티셔츠에서 부동산까지...LA 라이프스타일을 팔다
물론 브랜드의 오라(aura)를 결정하는 건 품질만이 아니다. 창업자 제임스 펄스(James Perse, 1972년생)는 LA 패션계 2세다. 그의 아버지 토미 펄스는 1969년 웨스트할리우드에 편집숍 ‘맥스필드(Maxfield)’를 열며 질 샌더·요지 야마모토 등을 캘리포니아에 처음 소개한 인물이다. 제임스는 어린 시절 맥스필드 매장 바닥을 놀이터 삼아 최신 패션과 현대 건축, 가구 디자인을 몸으로 익혔다.
디자이너 제임스 펄스. 사진 제임스 펄스 홈페이지
제임스 펄스의 세계는 야구 모자에서 시작했다. 20대 초반, 마음에 드는 야구 모자를 도무지 찾을 수 없어 직접 만든 게 계기였다. 할리우드 영화사와 음반사 회사들이 이 모자를 단체 주문하기 시작했고, 가능성을 본 후 1994년 티셔츠 라인을 론칭한다. ‘JP 클래식스’라는 브랜드명을 ‘제임스 펄스’로 바꾼 것도 이 무렵이다. 이름을 건 만큼 자신의 미학을 브랜드에 담았다.
그 미학의 핵심은 ‘일하는 부자들을 위한 옷’이었다. 디자이너 ‘헬무트 랭’ 같은 미니멀리스트에게서 영감을 받은 그는, 유니폼처럼 입을 수 있는 옷을 원하는 실리콘밸리의 부자들을 공략했다. 로고 없이 소재와 핏으로만 말하는 옷이다.
현재 제임스 펄스는 의류뿐만이 아니라 가구와 소품, 부동산까지 제안하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확장하고 있다. 사진 제임스 펄스 공식 인스타그램
현재 제임스 펄스는 의류 브랜드가 아니라 LA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에 가깝다. 말리부의 플래그십 스토어에는 의류 라인뿐만 아니라 침구류·그릇 등 리빙 제품과 당구대·야외용 소파를 포함한 가구에 더해 전기 자전거까지 구비돼 있다. 그는 “에르메스처럼 우리 상표를 달 수 있는 멋진 것들을 판다”고 했다.
흥미로운 것은 공식 홈페이지의 상품 목록에 있는 부동산들. 제임스는 자신이 꾸민 LA 저택을 판매하기도 하고, 미 서부와 멕시코의 고급 주택을 빌려주는 렌털 서비스도 하고 있다. 직접 인테리어를 하고 제임스 펄스의 가구와 소품들을 들인 집이다. 제임스 펄스의 미학이 적용된 집에서 살아보는 경험을 파는 셈이다. 그리고 그 미학의 중심에는 말리부 해변, 자연 채광, 느긋한 저녁 파티 등 LA 라이프스타일이 자리한다. 궁극적으로 제임스 펄스가 팔고 싶어하는 건 특정 제품이라기보다 LA에서 여유 있게 사는 삶의 이미지에 가깝다.
지는 유럽 럭셔리, 뜨는 미국 럭셔리
대표적인 미국 럭셔리 브랜드 랄프로렌은 지난해 4분기 매출이 전년 대비 10% 성장하는 등 뚜렷한 상승세를 기록하고 있다. 사진 랄프로렌
아는 사람만 아는 브랜드였던 제임스 펄스는 현재 전 세계 60개 이상의 매장으로 외형 성장을 하고 있다. 지난해엔 파리 8구 골든 트라이앵글에 첫 파리 플래그십을 열었고,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브라질 상파울루 등 신흥 럭셔리 시장으로도 확장 중이다. 국내엔 지난 2021년 한화 갤러리아를 통해 소개됐고, 현재 9개의 매장이 운영되고 있다.
제임스 펄스의 부상은 최근 글로벌 럭셔리 시장의 변화와 맥을 같이한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4월 “미국 럭셔리가 부상하고 있다”며 LVMH를 필두로 한 기존 유럽 전통 럭셔리가 아니라 미국의 신흥 럭셔리가 주목받고 있는 현상을 짚은 바 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LVMH의 의류·가죽 부문이 7분기 연속 하락하는 동안, 랄프 로렌·코치·더 로우 같은 미국 브랜드들이 조용히 실적을 거뒀다. 랄프 로렌은 지난해 4분기 매출이 전년 대비 10% 성장했고, 코치는 25% 급증하며 역대 최고 분기를 기록했다. 이코노미스트는 그 배경으로 미국 소비자들의 상대적 견고함, 미국산 럭셔리의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대를 꼽았다.
LA의 웰니스 라이프를 상징하는 미국 식료품 마트 브랜드 에레혼. 사진 에레혼 공식 인스타그램
여기에 ‘조용한 럭셔리(Quiet Luxury·로고 없는 명품)’ 수요도 강렬했다. 화려한 로고 대신 절제된 디자인을 내세운 더 로우가 700만 원짜리 가방으로 초고가 시장을 공략하고,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라이프스타일 시장을 공략하며 브랜드 존재감을 키워왔던 랄프 로렌이 심플한 집업 스웨터로 흥행몰이했다.
이런 흐름을 주도하는 브랜드 중 하나가 제임스 펄스다. 로고 없는 고품질, 비교적 합리적 가격 등 미국식 럭셔리의 성공 공식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면서 랄프 로렌의 미국 동부 프레피(사립학교) 감성이나, 더 로우의 뉴욕 미니멀리즘이 아닌 LA의 웰니스 라이프를 제안한다. 이는 최근 주목받고 있는 미 서부의 오가닉 식료품 마트 ‘에레혼(Erewhon)’의 인기와도 닮아있다. 이곳에서 파는 한 잔에 25달러(3만8000원)짜리 스무디와 제임스 펄스의 15만 원짜리 티셔츠는 결국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의 여유 있는 삶’이라는 공통된 감각 말이다.
b.멘터리
오늘날 브랜드는 개인의 가치관을 담는 중요한 소비 기호죠. 치열하게 ‘자기다움’을 직조하는 브랜드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기획자들을 만납니다. 남다른 브랜드의 흥미로운 디테일을 따라 가며 설레는 여정을 기록합니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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