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노조가 5월 총파업에 돌입한다. 3월 18일 삼성전자 노조 2개 단체(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지부노조·전국삼성전자노조)에 따르면 이날 전체 조합원을 대상으로 파업 찬반투표를 실시한 결과, 93.1%가 쟁의행위에 찬성했다고 밝혔다.투표에는 재적 조합원 약 9만 명 중 73.5%인 6만6019명이 참여했다.
[AP신문 = 이상민 기자] '뉴 삼성'의 비상을 가로막던 오랜 불확실성의 고리가 마침내 끊어진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 총수 일가를 짓눌러온 12조원 규모의 천문학적 상속세 납부 절차가 이달을 기점으로 5년 만에 마침표를 찍는다. 앞서 9년 가까이 발목을 잡았던 사법 족쇄를 끊어낸 데 이어, 그룹 지배구조를 뒤흔들 수 있었던 막대한 세금 부담까지 완전히 털어내면서, 이 회장을 정점으로 한 거함 '뉴 삼성'의 출항을 가로막던 암초들이 사실상 제거된 셈이다.
특히 올 1분기에만 57조원이 넘는 경이적인 영업이익을 기록함에 따라, 삼성전자는 이를 바탕으로 그간 지연됐던 미래 사업 투자와 대형 인수합병(M&A)에 본격적인 가속 페달을 밟을 준비를 마쳤다. 바야흐로 이 회장 중심의 '뉴 삼성' 체제가 굳건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진검승부를 펼칠 시점이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내부에서 뻗어 나온 거대한 몽니가 비상을 준비하는 '뉴 삼성'의 발목을 거세게 잡아채고 있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5월 총파업을 예고한 삼성전자 노동조합 공동투쟁본부는 올해 영업이익 기준선을 250조원으로 임의 설정하고, 이 중 15%인 37조5000억원 이상을 반도체 부문 성과급으로 즉각 지급하라는 요구안을 사측에 제시했다.
이는 국내 증시 시가총액 20위권인 대형 금융지주사나 중후장대 대표 기업들을 통째로 사들일 수 있는 규모다. 단일 기업의 특정 사업부 성과급 청구서가 웬만한 대기업 집단의 전체 시가총액을 웃도는, 한국 기업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형적인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37.5조원 성과급 청구서, 1년 R&D 예산이자 '하만' 4개 인수 규모
시장 일각에서 올해 삼성전자의 연간 영업이익이 300조원을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만큼 유례없는 호황기를 맞이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노조가 이 화려한 예상치를 근거로 막대한 현금을 당장 배분하라고 압박하는 것은 반도체 산업의 뼈저린 생존 문법을 철저히 망각한 처사란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반도체는 본질적으로 천문학적인 초기 설비 투자와 가혹한 감가상각이 끊임없이 동반되는 장치 산업이다. 호황기 때 벌어들인 잉여 현금을 차세대 공정과 인프라에 선제적으로 쏟아붓지 않으면 단숨에 도태되는 구조다. 사상 최대 실적이라는 달콤한 과실을 미래를 위한 재투자가 아닌 일회성 성과급 잔치로 탕진해 버린다면, 다가올 시황의 하강 국면에서 회사의 기초체력은 무참히 붕괴될 수밖에 없다.
실제, 노조가 내민 37조5000억원의 청구서는 삼성전자가 국가 경제의 젖줄인 반도체 초격차를 유지하기 위해 지난 한 해 동안 쏟아부은 연구개발(R&D) 투자비 37조7548억원과 고스란히 맞먹는다. 또 삼성의 성공적인 빅딜로 꼽히며 현재 전장 사업의 핵심 캐시카우로 자리 잡은 하만(Harman)의 최초 인수액 9조3000억원의 4배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액수다. 다시 말해, 사측이 노조의 요구를 수용한다면, 향후 미래를 책임질 4개의 글로벌 혁신 기업을 인수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셈이다. 노조의 근시안적인 이기주의가 회사의 백년대계를 갉아먹는다는 날 선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과거 삼성전자의 대형 M&A 사례를 복기해보면 기업이 보유한 막대한 현금의 전략적 가치는 더욱 명확해진다. 2011년 인수한 삼성메디슨이나 2016년 품에 안은 하만은 초기 부진의 꼬리표를 달기도 했으나, 끈질긴 체질 개선 끝에 현재 연간 1조원대 이익을 내는 알짜 자회사로 탈바꿈했다. 최근 사업지원 조직을 격상하고 M&A 전담팀을 꾸리며 로봇, 메드테크, AI 반도체 설계 등 이종 산업 간의 융합을 꾀하는 삼성에게 있어, 현재 쌓아둔 현금은 단순한 분배용 이익잉여금이 아니라 다음 100년의 명운을 담보할 '미래 생존 자금'이다.
무엇보다, 글로벌 테크 시장은 천문학적인 자본을 선제적으로 쏟아붓지 않으면 다가올 AI 패권 경쟁에서 영원히 도태될 수 있다는 절박한 생존 위기감이 시장 전체를 휩쓸고 있다. 구글의 알파벳, 마이크로소프트, 오라클 등 미국을 대표하는 빅테크 기업들은 살인적인 고금리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대규모 회사채를 무리하게 발행해 AI 데이터센터 등 설비 확충에 사활을 걸고 있다.
◆ 빅테크 '빚내서 AI 올인' 하는데…삼성은 '미래 생존 자금' 소진 위기
일례로 알파벳은 AI 인프라 재원 마련을 위해 1990년대 닷컴버블 이후 전례를 찾기 어려운 100년 만기 채권(센추리 본드) 발행 계획을 내놓아 시장을 놀라게 했다. 또 아마존은 미국과 유럽에서 500억달러(약 74조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했는데, 이는 미국 기업의 회사채 발행 역사상 4번째로 큰 규모이며, M&A와 무관한 발행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오라클 역시, 지난해 9월 180억달러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한 데 이어, 올해 2월에도 250억달러를 추가로 찍어냈다. 이는 당장의 재무적 출혈보다 미래의 주도권 상실을 더 뼈아프게 여기기 때문이다. 빚을 내서라도 미래의 파이를 키우겠다는 맹렬한 자본 전략이 실리콘밸리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삼성전자 역시, 촌각을 다투는 격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는 경쟁사와의 주도권 다툼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파운드리 부문에서는 압도적 1위인 대만 TSMC를 추격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최선단 공정 투자가 쉴 새 없이 집행되어야 하는 실정이다. 당장의 1분기 호실적에 취해 미래를 위한 핵심 무기인 R&D와 시설 투자 재원을 내부의 성과급 잔치로 소진해버린다면, 기술 발전 속도가 생명인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에서 도태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싸늘한 시선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글로벌 자본 시장은 기업의 잉여현금흐름이 미래 가치 창출을 위한 재투자로 이어지는지, 아니면 단기적인 인건비로 비효율적으로 낭비되는지를 냉정하게 평가한다. 만약 삼성이 노조의 무리한 파업 압박에 십조 원의 자본을 소모적인 성과급으로 배분하는 선례를 남긴다면, 경영진의 자본 배치 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가 훼손돼 대규모 자본 이탈이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글로벌 광풍 속에서 삼성전자의 입지는 분명 돋보인다. 사상 최대 실적을 바탕으로 매년 수백조 원 단위의 현금을 차곡차곡 쌓아두며 무차입 경영의 이점을 십분 활용해 투자와 인수를 동시에 타진할 수 있는 압도적인 체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로봇, 메드테크(의료기술), AI 반도체 설계(IP), 첨단 냉난방공조(HVAC) 등 다양한 미래 먹거리 분야에서 중대형 M&A를 추진할 수 있는 막강한 실탄이 준비된 상태다. 업계 전문가들은 빅테크의 차입 투자와 삼성의 현금 투자라는 뚜렷한 자본 전략의 차이가 향후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의 승패를 가를 핵심 변수라고 입을 모은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노조의 과도한 성과급 요구안은 빚을 내지 않고도 미래 투자를 단행할 수 있는 삼성전자의 강력한 구조적 우위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며, "반도체 산업의 투자 '골든타임'은 냉혹하리만치 짧다. 글로벌 빅테크들이 빚까지 내가며 미래 생존을 위한 실탄을 장전하는 전시 상황에서, 삼성만의 무기인 현금 탄창을 내부 잔치용 폭죽으로 터뜨리겠다는 것은 초격차의 심장에 스스로 비수를 꽂는 자해 행위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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