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기획
남도 의병 열전 23. 김영식
김영식(오른쪽에서 두번째)과 그의 가족들. 김영식 외손녀 문지연 씨 제공
우리 독립운동사를 들여다보면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 인물들이 적지 않다. 목포 출신 김영식(金泳植, 1899~1930)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20년대 목포 노동운동을 이끌었고, 신간회와 조선공산당 운동에도 참여하다가 국외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김영식을 단순히 노동운동가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만 이해해서는 그의 삶을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그가 남긴 글과 강연을 따라가 보면 오히려 한 시대의 변화를 읽고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끊임없이 고민했던 젊은 사상가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김영식은 1899년 8월 1일 목포 남교동에서 태어났다. 목포북교보통학교를 거쳐 민족교육의 전통이 강했던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의 유일한 여동생 김영애, 즉 독립유공자 김귀남은 정명여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4월 목포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다. 남매가 모두 일제 식민지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던 것이다.
와세다대 재학 시절 김영식은 조선인 유학생 사회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조선유학생학우회가 발행한 사상잡지 『학지광』에서 활동했으며, 제26호에 「사회주의 국가관의 새 경향」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같은 호에는 훗날 소설가가 된 박화성과 그의 오빠 박제민도 글을 실었다. 김영식의 글 때문에 잡지가 압수될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그의 문제의식이 얼마나 날카로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방학이면 귀국해 전국을 돌며 강연을 했다. 1922년 목포 양동교회에서 위생 문제를 강연했고, 1923년에는 조선청년회연합회와 동아일보 후원으로 전국 순회강연에 나섰다. 진주에서는 ‘문화운동의 경제적 고찰’, 인천에서는 ‘진아 실현과 경제적 장애’ 같은 주제를 다뤘다. 불과 스물네댓 살 청년이 사회·경제·문화의 구조적 문제를 분석해 대중에게 설명하고 있었던 셈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1923년 동아일보에 8회에 걸쳐 연재한 「민족주의의 장래」다. 그는 여기서 민족주의를 단순한 혈연적 공동체 의식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인도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투쟁을 ‘자기실현을 이상으로 하는 민족주의, 곧 국민주의’로 해석하고, 이를 억압하는 영국의 태도는 제국주의라고 규정했다.
와세다 재학 시절 김영식(좌)과 박제민(우)씨. 김영식 외손녀 문지연 씨 제공
이러한 인식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선구적이었다. 민족은 혈통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려는 정치적 공동체라는 관점이었다. 김영식에 관한 글을 쓴 초당대 박해현 교수는, 그가 ‘국민주의’라는 표현을 강조한 데 주목한다. 1920년대 들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갈등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김영식은 어느 한쪽을 무조건 배척하기보다 식민지 조선의 독립이라는 공동목표 속에서 두 흐름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5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김영식은 귀국해 사상을 실천으로 옮겼다. 그해 8월 목포에서 전위동맹을 결성하고 노동자들의 생활 실태를 조사했다. 전위동맹은 직업별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시작했고, 9월 제유공노동조합을 시작으로 면업·자유노동·정미노동조합 등이 잇따라 창립됐다. 이어 10월에는 8개 부문, 약 1천770명의 노동자를 아우르는 목포노동총동맹이 출범하였다. 목포 노동운동이 조직적 대중운동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김영식이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사건이 1926년 목포 제유공 파업이다. 조선제유주식회사 목포공장은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식물성 기름 생산공장이었다.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노동을 10시간으로 줄이고,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없애며 임금을 올려줄 것을 요구했다.
1926년 1월 파업이 시작되자 170여 명의 직공 가운데 136명이 동참했다. 회사는 파업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하고 외지에서 새로운 노동자를 모집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규찰대를 조직하고 두 달 넘게 파업을 이어갔다. 목포뿐 아니라 광주·나주·영암·강진·진도·완도 등지의 노동·청년단체가 이들을 지원했고, 서울에서도 노동·청년단체들이 위문단과 성금을 보내왔다. 목포의 한 공장 파업이 전국적인 노동운동으로 확산된 것이다. 최근 필자가 확인한 형사사건부를 보면 기소와 불기소 대상자가 40명을 넘을 정도여서 당시 광주·전남 지역에서 보기 드문 대규모 노동쟁의였음을 알 수 있다.
3월 17일 파업 노동자 일부가 공장에 들어가 시설을 파손하면서 일제 경찰은 전위동맹과 노동조합 간부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김영식도 박제민, 배치문, 조극환 등과 함께 붙잡혀 약 석 달 동안 구금됐다. 비록 김영식은 최종적으로 면소됐지만, 이 사건은 그의 삶에 큰 흔적을 남겼다. 훗날 그가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데에는 이 시기 투옥과 고문의 후유증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출옥한 김영식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27년 신간회 목포지회 결성에 적극 참여했다. 그가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함께 참여한 신간회 운동에 깊이 관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미 그는 몇 년 전부터 두 사상의 대립을 넘어 식민지 현실에 맞는 새로운 운동 방향을 고민하고 있었다.
1927년 동아일보에 발표한 「전환기에 직면한 조선 신흥운동」에서도 이러한 문제의식이 뚜렷하다.
그는 새로운 사상을 무조건 수용할 것이 아니라 조선 사회가 걸어온 역사적 과정과 현실의 특수성을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르크스주의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도 외래 이론을 그대로 가져다 적용하기보다 우리 역사와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김영식을 단순한 운동가가 아니라 사상가로 평가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이후 김영식은 조선공산당 활동에 참여했다. 1928년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만주로 망명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오랜 투옥과 망명생활 속에서 건강이 크게 악화되고 말았다. 그는 길림성 연길현 숭례향에서 요양하다가 1930년 7월 6일 불과 서른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 언론은 그의 죽음을 ‘사회운동의 거성’의 서거로 보도하였다. 조선일보는 그가 와세다대학 시절부터 사회운동에 참여했고 목포 제유공 파업을 지도하였으며 국외에서 활동을 계속했다고 상세히 전했다. 현지 장례도 사회단체 연합장으로 치러졌다. 목포에서는 추도회를 준비하려 했으나 일제 경찰이 관계자들을 검거하며 이를 막았다. 한 젊은 독립운동가의 죽음을 일제가 그토록 경계했던 사실 자체가 당시 김영식이 지닌 사회적 위상을 말해준다.
조선일보에 기록된 김영식의 사망 기사. 김영식 외손녀 문지연 씨 제공
대한민국 정부는 뒤늦게 김영식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러나 김영식에 대한 평가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운 노동운동가였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독립운동가였다. 동시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거대한 사상적 흐름이 충돌하던 시대에 양자를 넘어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을 찾으려 했던 지식인이었다. 무엇보다 서양에서 들어온 사상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우리 역사와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한 토대 위에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른한 해라는 짧은 생애 속에서 그는 글을 쓰고, 강연하고, 노동자를 조직하고, 감옥에 갇히고, 끝내 망명지에서 생을 마쳤다. 그가 꿈꾸었던 세상을 온전히 확인하기에는 남겨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김영식의 이름을 다시 불러야 한다. 목포 노동운동사의 한 인물로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현실 속에서 민족의 미래와 새로운 사회를 고민했던 남도가 낳은 위대한 사상가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그의 글과 삶의 궤적을 다시 찾아 그가 꿈꾸었던 세상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는 일, 그것이 늦게나마 김영식에게 드리는 진정한 역사적 예우일 것이다.
차솔빈기자 ehdltjstod@mdilbo.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