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을 지운 교실은 조용할지 몰라도, 그 침묵 속에서 아이들은 현실의 무게를 견딜 힘을 전혀 배우지 못한다. 바람을 막아주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다. /사진 셔터스톡
김진국 문화평론가 - 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요즘 학교에서 수학여행이 줄고, 소풍이 취소되고, 운동회가 사라지고 있다. 점심시간의 축구와 방과 후 농구도 사라진다. 현장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비슷하다. 안전사고 예방, 학교 폭력 방지 등이 그것이다. 안전사고에 대한 모든 책임을 교사와 학교가 뒤집어쓰는 상황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문제는 이러한 표면적인 이유 말고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내 아이가 기죽으면 안 되고, 내 아이가 상처받으면 안 된다’는 학부모의 민원이 그것이다. 이 흐름은 언뜻 아이를 향한 세심한 배려와 선의에 기반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 사회 전반을 관통하는 거대한 심리적 장벽이 놓여 있다. 바로 ‘경쟁 회피 심리’다.
경쟁 회피는 단순히 경쟁을 싫어하거나 승부욕이 없는 ‘소극적 회피 전략’이 아니다. 이건 경쟁에 따르는 긴장, 타인과 비교, 필연적인 실패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적 불편함을 사전에 원천 봉쇄하려는 ‘적극적 방어 전략’이다. 결과를 완벽히 통제할 수 없다고 아예 상황 자체를 없애버리는 방식이다. 실제로 서울시교육청의 자료에 따르면, 초등학교 체험 학습 시행 비율이 최근 몇 년 사이 급감했다. 이것은 단순한 운영상 축소가 아니다. 위험과 갈등을 회피하려는 구조적 선택의 결과다.
교육적 모험보다 무풍지대 선택
왜 학교는 이토록 극단적인 회피 전략을 선택하게 됐을까? 단순히 교육적 가치관이 변해서?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 사회의 왜곡된 민원 문화와 위축된 교권이라는 구조적 한계 때문이다. 학교는 사소한 갈등이나 가벼운 찰과상조차 ‘관리 부실’로 엄격하게 책임 추궁을 당한다. 아이 간 정당한 경쟁 속에서 발생하는 마찰이 곧바로 법적 분쟁이나 악성 민원으로 이어진다. 학교나 교사가 교육적 모험을 시도하기보다 ‘무풍지대’를 만드는 편을 선택하게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경쟁 회피가 아이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는 소리다. 갈등의 원인을 보지 않고, 책임 소재도 엉뚱한 데 떠넘기는 당국의 비겁함과 무능함의 합작품이다. 물론 심리적 안정을 강조하는 흐름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안정감이 학습 동기를 높이고, 위협이 과도할 경우 뇌의 편도체가 활성화돼 수행 능력을 떨어뜨린다는 연구가 이미 충분히 축적돼 있다. 특히 발달 단계에 있는 아동기에는 서열 중심 과잉 경쟁이 만성적인 불안과 번아웃을 유발할 수 있다는 지적 역시 타당하다. 문제는 방향이 아니라 ‘임계점’이다. 경쟁의 독성을 조절하는 것과 경쟁이라는 자극 자체를 제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선택이다. 미국의 일부 공립학교에서 오히려 스포츠 활동을 체계적으로 확대함으로써 학교 폭력을 획기적으로 줄인 사례가 있다. 대표적으로 시카고의 한 중학교에서는 축구와 농구 리그를 정규 교육과정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도입한 이후 폭력으로 인한 학생 징계 건수가 눈에 띄게 감소했다. 학생 간 갈등을 억누르고 격리한 게 아니다. 정교하게 설계된 ‘규칙’이 있는 경쟁 속에서 자기 에너지를 표출하고 타인과 조정하게 한 결과였다. 이는 경쟁 자체가 악이 아니라, ‘통제되지 않고 관리되지 않는 경쟁’이 문제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관리된 경쟁’ 통해 긴장감 부여해야
비교와 경쟁을 통해 자기 위치를 인식하고 성장 좌표를 설정하는 것은 인간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다. 융(Jung) 심리학에서 말하는 ‘억압된 충동의 왜곡’ 개념을 빌려오자면, 인간 내면에 있는 투쟁적 에너지는 억압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건강한 통로를 찾지 못한 경쟁심은 내부로 침잠해 자기 비난과 무력감이 되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왜곡된 형태의 공격성으로 표출된다. 경쟁이 사라진 교실 뒤편에서 사이버 폭력이나 은밀한 소외가 더 교묘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본질적인 문제는 교육과 현실 간 극심한 괴리일 것이다. 현재의 학교는 갈등을 없애고 경쟁을 줄이는 방향으로 급격히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학교 밖 사회는 여전히 성과와 평가, 치열한 적자생존의 논리에 의해 작동한다. 이런 환경에서 갈등을 조정해 본 경험도, 정당한 패배를 받아들여 본 경험도 없이 성장한 아이는 사회에 나가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강한 평가 상황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완벽하게 보호된 온실에서 자란 묘목이 야생의 기후를 견딜 수 있을까? 그 충격은 단순한 스트레스를 넘어 자기 정체성 붕괴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대안은 무엇인가. 답은 경쟁 제거가 아니라 ‘경쟁 재설계’ 에 있다. 재설계란 단순히 경쟁 강도를 낮추는 미온적 대처가 아니다. 경쟁을 파괴적인 서열화 도구가 아닌, 성장을 위한 강력한 학습 도구로 전환하자는 말이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도입돼야 할 모델은 ‘성장 참조 평가(Growth-Referenced Evaluation)’ 강화다.
타인과 절대적 순위가 아니라, 어제의 나보다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수치화하고 이를 경쟁의 핵심 지표로 삼는 방식이다.
또한 개인 간 무한 경쟁을 ‘협력 기반의 팀 경쟁’으로 전환해야 한다. 혼자 잘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팀원과 소통하고 역할을 분배해야만 승리할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경쟁 구도에서 협동의 가치를 체득하게 해야 한다. 에듀테크를 활용해 각자 수준에 맞는 ‘적정 난이도의 경쟁 상대’를 매칭해 주는 방식도 효과적이다. 너무 강한 상대 앞에서 좌절이나 너무 약한 상대 앞에서 오만이 아닌, 몰입을 경험할 수 있는 적절한 긴장을 제공하는 것이다. 나아가 평가 구조 또한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반복 가능한 과정’으로 변해야 한다. 한 번의 실패가 곧 인생의 탈락으로 직결되지 않도록, 실패 이후 재도전 기회를 구조적으로 보장하는 ‘패자 부활 시스템’을 교육과정에 녹여내야 한다. 이러한 ‘관리된 경쟁’은 아이에게 긴장감을 부여하면서도 그것이 파괴적 에너지가 아니라 성장 자원이 되도록 유도한다.
“바람 속에서 뿌리 내릴 수 있도록 돕는 게 진짜 사랑”
지금 우리는 교육의 본질에 대해 다시 질문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이 단순히 지식을 주입하거나, 아이를 무사고로 무사히 졸업시키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학교는 아이가 미래 사회의 불확실성과 경쟁을 견디고, 그 속에서 자기 길을 찾을 수 있는 ‘심리적 근육’을 단련하는 훈련소가 돼야 한다. 만약 학교가 사회적 마찰을 완전히 제거한 진공 상태가 된다면, 그 안에서 자란 아이는 바깥세상의 거친 숨결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우리는 진정으로 아이를 보호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어른이 마주하기 힘든 불편한 현실을 다음 세대에게 미루고 있는가. 경쟁을 지우는 것이 아이의 미래를 위한 선택인지, 아니면 민원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학교와 불안을 회피하려는 부모의 합작품인지 자문해야 한다. 수학여행과 소풍 그리고 축구가 사라진 교실은 겉으로는 평온하고 안전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적막한 평온은 막대한 대가를 요구한다. 그것은 아이가 타인과 부딪히며 나를 발견하고, 쓰라린 패배 속에서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울 기회를 박탈당한 대가다. 내 아이 기죽는다고 식당에서 마구 떠들고 소란을 피워도 수수방관하면서 ‘노 키즈 존’만 비난하는 학부모. 칠판에 있는 수학 문제 풀려서 내 아이 기를 죽였다고 교사에게 항의하는 철없는 학부모. 대학교수에게 내 아들 과제 너무 많이 내준다고 항의하는 헬리콥터 부모. 그들은 자기 아이를 비바람으로부터 지켜내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을 것이다. 제 아이의 뿌리가 뻗어 나갈 단단한 흙을 치우고 있는지도 모르고. 바람을 한 번도 맞아보지 못한 나무는 곧고 아름답게 자랄지 몰라도, 생애 첫 폭풍을 만나는 순간 가장 먼저 꺾이고 말 것이다. 경쟁을 지운 교실은 조용할지 몰라도, 그 침묵 속에서 아이는 현실의 무게를 견딜 힘을 전혀 배우지 못한다. 바람을 막아주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다. 바람 속에서도 단단하게 뿌리 내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짜 사랑이다. 제발 우리 아이에게 ‘상처 없는 교실’ 대신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는 운동장’을 되돌려주자.
김진국 문화평론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