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곳곳에서 이어지는 전쟁의 포성과 불안한 에너지 가격의 급등은, 오늘의 문명이 얼마나 위태로운 균형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류는 지금도 불확실한 휴전과 흔들리는 경제 질서 사이에서 내일을 겨우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 것은 바깥의 물리적 위기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사회 내부에서 커져가는 집단 이기주의와 기득권의 경직된 언어가 공동체의 도덕적 기반을 서서히 잠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아프게 다가옵니다.
최근 삼성전자 노조는 작년 영업이익의 15%인 40조원을 성과급으로 요구하고 미수용 시 파업으로 20조~30조원의 회사 피해 발생 가능성을 언급하였습니다. 40조원은 삼성전자 국내/해외 전직원 12만명으로 단순 균등하더라도 1인당 3억 3000만원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현재 성과급이 연봉의 50%~100%로 되어 있는 것을 영업이익의 15%로 고정 명문화를 요구하는데, 회사의 영업이익은 투자(CAPEX), R&D, 배당, 부채상환 등에 우선 쓰여야 합니다. 15%를 인건비로 고정 배분하면 투자 여력 급격히 축소되어 제조/반도체 업계는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그래서 국내에서 영업이익 15%를 시행하는 곳은 프로핏 셰어링을 하는 게임업체 1곳을 제외하고는 전무합니다.
그래서 이번 사건이 단순한 노사 간 이견을 넘어, 오늘의 대한민국이 노동의 권리와 공동체의 책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묻는 상징적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동의 정당한 보상은 물론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요구가 사회 전체의 형평성과 공공성 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함께 묻지 않는다면, 노동의 이름으로 주장되는 권리는 자칫 공동체적 신뢰를 해치는 방향으로 기울 수 있습니다.
그 결실은 과연 오직 그들만의 땀방울이었는가?
노조는 막대한 영업이익과 성과의 상당 부분이 자신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그 말에는 물론 일정 부분 타당성이 있습니다. 현장의 노동 없이는 어떤 생산도, 어떤 이익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결실 중 상당부분을 오직 특정 집단만의 전유물처럼 이해하는 순간,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갑니다. 조금만 거시적·미시적 시야를 넓혀 보면, 그 성과는 결코 개별 집단의 노력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함께 감내하고 축적해 온 사회적 자본의 산물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시적으로 볼 때 삼성전자의 반도체 경쟁력은 국가의 제도적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정부는 이른바 ‘K-칩스법’ 등을 통해 대규모 세제 혜택을 제공했고, 평택과 용인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반도체 클러스터를 떠받치기 위한 전력과 용수, 교통과 산업 인프라 역시 공공의 비용과 국민적 부담 위에서 마련되었습니다. 더욱이 미·중 갈등이라는 거센 국제정치의 파고 속에서 우리 정부가 확보해 온 전략적 공간과 외교적 완충지대 또한 기업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국가적 방패였습니다.
미시적으로 보더라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고급 인적 자원은 공교육과 사회적 투자 속에서 길러진 인재들이며, 대기업의 이익 구조는 수많은 중소 협력업체와 하청 노동자들의 인내와 희생 위에서 유지되어 왔습니다. 이 지점을 외면한 채 성과의 과실만 독점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공동체의 기여를 지나치게 축소하는 태도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마이클 샌델은 “성공이 온전히 자신의 능력과 노력만의 결과라는 믿음은 공동체에 대한 부채 의식을 약화시킨다”는 취지의 통찰을 남긴 바 있습니다. 이 말은 오늘 우리 사회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공동체의 유무형적 지원을 망각한 채 결실의 더 큰 몫만을 요구하는 사회는 결국 자신이 서 있는 토대마저 보지 못하는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17일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삼성그룹 초기업노동조합 조합원들이 과반노조 공식 선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 연합뉴스
귀족화된 노조의 성벽은 누구의 한숨 위에 세워지는가?
노동의 권리는 마땅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사회에서 비판받는 소위 귀족노조의 행태는, 정당한 노동운동의 취지를 넘어 기득권의 자기방어 논리로 굳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된 고용을 보장받는 집단이 더 큰 파이를 요구하며 국가 경제 전반에 부담을 주는 방식으로 압박에 나설 때, 성벽 바깥에서 묵묵히 일하는 수많은 저임금 노동자들과 청년 세대는 깊은 박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문제는 단지 돈의 크기만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노동의 도덕성입니다. 노동이 존엄한 이유는 많이 받기 때문이 아니라, 공동체를 함께 떠받치는 책임의 윤리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미 사회 상층의 처우를 누리는 집단이 끊임없이 더 큰 몫만을 외친다면, 노동의 이름은 연대의 언어가 아니라 우선권의 언어로 오해받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노동은 더 이상 약자를 위한 정의의 깃발이 아니라, 기득권을 지키는 울타리로 보이게 됩니다.
존 롤즈는 『정의론』에서 “사회적 불평등은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익이 될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취지의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롤즈의 눈으로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면, 이미 최고의 처우를 받는 이들이 더 많은 몫을 요구하는 구조가 과연 공동체 전체의 정의에 부합하는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가장 낮은 곳의 노동이 절망을 견디고 있는데, 가장 높은 곳의 노동만 더 큰 몫을 독점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없습니다.
노동 카르텔, 공정의 문을 닫는 낡은 구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일부 노조와 직종에서 나타나는 독점적 구조와 비정상적 관행입니다. 일부 노조 영역에서 제기되어 온 인력 공급권 독점 문제는 사업자의 채용 자율성과 노동시장의 개방성을 제한하며, 결과적으로 노동시장을 카르텔화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노동운동이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여야 함에도, 특정 집단이 진입의 문을 스스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구조로 굳어진다면 그것은 연대가 아니라 배제의 시스템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노조세습, 또는 우선채용 조항으로 불려 온 일부 관행도 반드시 공론장에서 다시 점검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일자리가 자녀에게 사실상 우선적으로 연결되는 구조는, 아무리 명분을 붙인다 해도 청년 세대가 체감하는 공정의 원칙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기회는 능력과 노력, 절차적 정당성 위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특정 조직의 울타리 안에서 고용이 대물림되는 구조가 용인된다면, 그것은 청년들에게 “세상은 노력보다 줄과 소속이 더 중요하다”는 깊은 냉소를 심어주게 됩니다. 노동운동이 도덕성을 잃고 세습과 독점의 구조로 흐를 때, 그것은 더 이상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방패가 아니라 조직화된 기득권의 장치로 의심받게 됩니다.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노동운동이 가장 아픈 자기 성찰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노동 현실을 바라보며 많은 국민들이 입에 올리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양대 노총 카르텔’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말이 다소 거칠게 들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표현이 왜 등장했는지, 왜 적지 않은 시민들이 그렇게 느끼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동운동을 이끄는 양대 노총이 과연 공동체 전체의 지속 가능성과 약한 노동의 현실까지 함께 대변하고 있는지, 아니면 조직화된 강한 노동의 이익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운동은 본래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에 대한 책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 국가 경제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양대 노총은 이러한 철학적 성찰보다, 강성 노조의 요구를 제도화하고 그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더 익숙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비판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노동운동은 스스로의 도덕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길로 가고 있는 셈입니다.
노동이란 인간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의무와 책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입니다. 권리만을 외치고 공동체적 책임은 뒤로 미루는 노동은 결국 자기 영혼의 깊이를 잃게 됩니다. 노동의 철학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목소리의 크기와 조직의 힘뿐입니다. 그러나 목소리가 크다고 해서 언제나 정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힘이 있다고 해서 곧바로 도덕적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 노동 현장도 ‘성찰의 일기’를 써야 할 시간
우리 사회 곳곳에는 아직 충분히 들리지 못한 노동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대기업 담장 밖에서 계약 연장을 걱정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취업의 문턱 앞에서 좌절하는 청년들, 고물가 속에서 하루의 생계를 견디는 서민들, 이름도 없이 일하지만 제 몫의 존엄을 인정받지 못하는 수많은 현장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침묵은 결코 조용해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외면받아 왔기 때문에 더 무겁습니다.
오늘의 노동 현장에도 필요한 것은 분노의 언어 이전에 성찰의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당함에 맞서는 외침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찰 없는 외침은 쉽게 자기 권리의 과잉으로 흐르고, 공동체를 향한 책임 없는 투쟁은 쉽게 또 다른 특권 구조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땀방울은 원래 숭고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 삶을 떠받치는 가장 정직한 표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땀방울이 공동체 전체의 균형과 공정을 외면한 채 오직 더 큰 몫을 위한 무기로 쓰일 때, 노동의 숭고함은 스스로 상처를 입게 됩니다. 삼성전자의 성공이 국가와 국민의 지원 위에서 피어난 꽃이라면, 그 결실 또한 보다 넓은 책임과 더 큰 공공성의 시야 속에서 논의되어야 합니다.
저는 노동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동이 다시 존엄의 이름으로 불리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존엄은 언제나 책임과 함께 가야 합니다. 일부 귀족화된 노조의 기득권화, 노조세습의 낡은 관행, 양대 노총 카르텔이라는 불편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은 채 노동의 미래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픈 지점을 외면한 온건함은 결코 정의가 아닙니다. 문제를 분명히 지적하되,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한 방향으로 그것을 이끌어 가는 것이 진정한 공공의 언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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