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원 감독의 ‘비광’. 출처 네이버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온 덕에 9월의 더위는 그런 대로 견딜 만하다. 그래도 아직 날이 덥다. 더위 속에 추석이 오려나 싶다. 필자는 이런 더위 속 추석을 경험한 적이 있다. 1983년의 추석이 그랬다. 음식준비도 힘들었고 음식보관에도 쩔쩔 맸던 때였다.
영화 ‘비광’은 곧 다가올 추석을 상기시킨다. 모처럼 만에 가족들이 모이면 친선게임처럼 화투를 만져보기도 하니까. 필자는 어릴 적 할머니 어깨 너머로 배운 민화투밖에 몰라서 난이도가 높은 고스톱이며 이름이 다른 놀이에는 아예 끼질 않는다. 그래서 ‘비광’이 일반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 수 없다. 다만, 제목에서 유추하는 명절이나 가족 게임, 아니면 투기판이 벌어지는 영화일까를 상상하게 한다. 그런데 영화 ‘비광’은 이런 예상을 비껴간다.
9회말 2아웃. 절체절명의 순간에 끝내기 홈런을 날리는 황중구 선수(배우 류승룡). 순간 그는 구장의 멋진 영웅이 되고 인기는 최절정을 치닫는다. 이 정도의 인기 야구선수라면 톱스타 여배우와의 결혼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중구는 톱스타 남미(배우 하지원)와 결혼한다.
세상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던 이 부부에게 어느날 가수 정은아가 자살하면서 남긴 유서로 인해 중구의 딸이라는 동주(아역배우 이유주)가 나타난다. 이 사건으로 부부는 파경을 맞는다. 스캔들은 인기인을 급격하게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결과를 낳는다. 8년 후, 중구는 잊힌 전직 야구선수로서 소시민의 삶을 사는 중이다. 일곱 살 때 중구에게 왔던 아이는 어느덧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은 10대 소녀 동주(배우 김시아)로 성장한다. 남미 또한 추락한 인기 때문에 생계형 연예인으로 전락해 있다.
동주는 친구 혜리의 추락사에 연루되어 ‘우림천 여중생 사망사건’의 용의자가 된다. 중구가 딸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중에 어느덧 남미 또한 동주 구하기에 관여하고 협조하는 중이다. 8년 전, 중구는 자신과 가족의 추락이 구단주 곽창기(배우 유재명)의 심사를 거슬린 ‘황중구 밟기’ 계획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아버지로서의 중구는 힘 있는 자에게 패기 넘치게 대들던 그때와 다르다. 딸을 구해내야만 한다.
이러한 줄거리인데 배우들의 표정은 어둡고 고단하다. 미장센 또한 그늘지고 습한 느와르다. 가장 큰 문제가 주제이자 소재인데, 느와르 속에서 가족애를 끌어내고 인간미를 부상시키기에는 소재를 향한 시선이 다양해서 분산된다.
사회적 편견, 부패한 언론, 정·재계와 연예계를 잇는 카르텔, 기득권의 민낯 그리고 가족애라는 다채로운 소재는 썩 참신하지는 않다. 부성애를 마음껏 발휘하려면 힘 있는 정치적 야망과 맞서 싸우든지 무릎을 꿇든지 해야 한다거나 언론을 조작하는 폐단 앞에서 소시민은 한없이 나약하기만 하다는 등 관객들이 익히 알고 있는 지난 시대의 사회상에는 관객의 공감력을 끌어올리기에 약하다. “행복했다고? 넌 행복하면 안돼!” 소리치던 곽창기 신은 그나마 새로웠다.
전체적으로 소재의 나열에 그쳐 있다 보니 어두운 소재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긴박감이나 클라이맥스 등을 끌어올리거나 내리지를 않았다는 느낌이어서, 영화관을 나서는 머릿속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비광’의 상징성이 무엇인지 개인적으로 잘 전달되지 않았다. 곽창기의 대사 “비광 같은 놈”은 어떤 부정적 의미이며, 어머니(배우 김해숙)의 대사 중에 “비광 같은 내 새끼”란 어떤 긍정적 의미일까 잘 알 수 없었다. 비광이란 아무래도 양가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광이자 애매한 위치의 패인가 보다.
영화의 인물들도 양가적이다. 좋은 부모이자 실패한 부모이며 상처받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사람의 관계는 누구나 누군가에게 실패한다. 부모도 자식에게 실패하고, 연인도 서로에게 실패하고, 친구도 친구에게 실패한다. 인간 간의 실패는 어쩌면 다반사일지 모른다. 다만, 실패한 뒤에는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실패한 아버지는 딸을 구하는 책임을 지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구한다. 과거의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그 과거가 미래의 행동까지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과거를 짊어진 채 다른 선택을, 책임을 이행해야 하는 것이다.
가족이란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는 관계가 아니다. 수없이 실망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결핍과 불완전함을 갖고 그 상처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관계다. 야구 경기가 홈에서 출발, 1루-2루-3루를 밟고 다시 홈으로 돌아오듯. ‘사랑하기 때문에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지기 시작하면서 사랑의 의미가 생겨나는 것’은 영화 ‘비광’의 중심축이다.
이지원 감독의 ‘비광’.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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