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

[김재준의 생존경제학 6] 에너지는 자원이 아니다

한국전력이 삼성전자 데이터센터에 파는 전기는, 동시에 그 데이터센터 안에서 운용되는 AI의 모든 사유(思惟)의 물리적 기반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 기억이 있다. 디지털 문명에서 인류의 모든 기억 — 사진, 영상...

[김재준의 생존경제학 6] 에너지는 자원이 아니다

국가를 살리는 '대사(Metabolism)'

서론 — 불, 시간, 대사

역사적 순서는: 칼 → 규칙 → 매력. 문명의 축이 된 국가들을 보면, 거의 예외 없이 같은 순서를 밟았다. 1단계: 물리적 강제력, 2단계: 제도적 표준 설정(규칙을 쓰는 자가 문명입니다), 3단계: 문화적 매력(꽃).

그러나, 한국이 시도하는 역순은: 꽃과 부품 → 규칙? → 칼?  부품의 대체 불가능성 + 감정의 세계적 매력으로, 칼과 규칙을 거치지 않고 문명의 한 축이 되는 것 이라 할 수 있다. 문명과 문화의 이분법 자체가 21세기에는 흔들리고 있다. 알고리즘 시대에 가장 많이 소비되는 감정의 형식을 만드는 국가는, 단순한 문화 수출국이 아닌 감정 인프라의 공급자이다.

한국은 패권국이 되기는 어렵지만, 문명의 하드웨어(에너지 부품, 반도체)와 문화의 소프트웨어(감정, 미학)를 동시에 공급하는, 세계가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이중 노드가 될 수 있다. 반도체·에너지·AI의 정밀함과 K-pop·영화·디자인의 감정적 밀도를 결합하여 21세기에 한국만이 생산할 수 있는 새로운 범주의 수출품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성공할지는 알 수 없다. 전례가 없으니. 그러나 전례가 없다는 것은, 성공한다면 다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은 문명이면서 문화일 수 있는가?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되려면, 한국은 역사에 없던 일을 해야 한다. 부품의 정밀함과 감정의 깊이를 하나의 산업 문명 안에서 통합하여, 기존의 "문명 vs 문화" 이분법 자체를 무효화하는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야 한다. 독일은 문화가 문명이 되려다가 실패한 케이스 일 수도 있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한국은 패권국이 아닌 다른 무언가 — 세계가 작동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되, 세계를 지배하지는 않는 존재— 가 될 수 있다. 이것에 아직 이름은 없다. 그리고 역사가 가르치는 한 가지가 있다면, 이름이 없는 것을 이름 붙이는 자가 그것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인류 최초의 에너지 혁명은 불이었다. 약 40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가 불을 통제하기 시작했을 때, 바뀐 것은 온도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불은 밤을 낮으로 바꿨다. 어둠 속에서 멈춰야 했던 손과 눈이 불빛 아래에서 계속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리처드 랭엄(Richard Wrangham)의 '요리 가설'에 따르면, 음식을 불에 익혀 소화 에너지를 절약하자 그 잉여가 뇌의 발달로 향했다. 이 가설이 맞든 틀리든,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불이 인간에게 준 것은 열이 아니었다. 더 많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18세기 석탄은 이 논리를 산업적 규모로 확장했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이 바꾼 것은 공장의 속도가 아니라 공장이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의 양이었다. 강물이 얼어도, 바람이 멈춰도, 석탄은 탔다. 인간의 노동은 자연의 리듬에서 풀려났다. 20세기 석유는 이 해방을 지구 전체로 밀어 올렸다. 자동차, 비행기, 플라스틱 — 석유 문명의 모든 산물은 결국 시간의 압축이었다. 뉴욕에서 런던까지의 거리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그 거리를 건너는 데 걸리는 시간이 줄어든 것이다.

이제 이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패턴이 보인다. 에너지는 열량(calorie)이 아니다. 에너지는 인간이 단위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의 양 — 시간의 밀도(Density of Time) — 를 결정하는 조건이다.

물론 에너지는 자원이기도 하다. 석탄은 캐면 줄어들고, 우라늄은 유한하며, 천연가스는 수입해야 한다. 그러나 에너지를 자원으로만 보는 관점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다. 자원은 소비되면 사라지지만, 에너지의 흐름이 멈추면 문명이 죽는다. 심장이 피를 보내는 것은 자원의 소비가 아니라 생명 유지의 조건이다. 에너지도 마찬가지다. 전력이 끊기면 병원의 인공호흡기가 멈추고, 반도체 공장의 클린룸이 오염되고, 금융망이 정지한다. 에너지는 쓰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흘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글의 핵심 명제다. 에너지는 자원 이상의 것, 곧 대사(代謝, Metabolism)다. 자원이라는 말은 에너지를 수요·공급의 도표 위에 올려놓는다. 대사라는 말은 에너지를 생명 유지의 조건으로 격상시킨다. 자원의 관점에서 에너지 정책은 '얼마나 싸게 살 것인가'의 문제다. 대사의 관점에서 에너지 정책은 '어떻게 멈추지 않게 할 것인가'의 문제다.

물론 이것은 완성된 답이 아니다. SMR의 경제성·안전성 논쟁은 현재 진행 중이며, 재생에너지 진영은 "기술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SMR에 집착하는 대신 재생에너지와 수요 관리로 즉시 전환하라"고 반박한다. 이 글은 그 논쟁 위에 서 있다. 에너지를 경제 논리만이 아니라 정치·지정학·문명적 대사의 관점으로 해부하되, 기술 선택의 복잡한 트레이드오프를 함께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다.

대사의 밀도 — 왜 지금 이 논의가 긴급한가

불에서 석탄으로, 석탄에서 석유로 — 매번 에너지 전환이 일어날 때마다 문명이 요구하는 대사의 밀도는 한 차원 높아졌다. 그리고 지금, AI라는 거대한 뇌(Brain)가 문명의 몸에 이식되면서 대사의 밀도는 다시 한번 전례 없는 수준으로 치솟고 있다.

IEA(국제에너지기구)의 2025년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는 2030년까지 약 945TWh에 달할 전망이다. 이는 일본 전체의 현재 전력 소비량과 맞먹는 규모다. 골드만삭스 리서치는 더 나아가,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2023년 대비 2030년까지 175% 증가할 것으로 전망한다 — 이는 세계 10위권 전력 소비 국가 하나가 통째로 추가되는 것에 해당한다.

더 충격적인 수치가 있다. IEA는 2030년까지 미국 경제가 데이터 처리에 소비하는 전력이 알루미늄을 포함한 모든 에너지 집약 제품 제조에 쓰이는 전력을 초과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생각이 제조를 넘어서는 시대. 한국에서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한 곳이 요구하는 전력은 수 GW 수준으로,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의 전면 수정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에너지 제약은 더 이상 단순한 '정전'이 아니다. 국가적 생산 능력 자체의 마비 — 즉 대사 불능(Metabolic Failure) — 의 문제다.

에너지 패권의 세 가지 축

국가의 에너지 대사를 구성하는 경쟁 구조는 세 개의 축으로 정리된다. 이 세 축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 하나가 무너지면 나머지 둘도 흔들린다. 인체의 순환계

신경계

면역계가 동시에 작동해야 생명이 유지되듯, 세 축의 동시 작동이 국가 대사의 조건이다.

축 1. 기술

인프라 — 멈추지 않는 심장을 이식하라

AI 데이터센터가 요구하는 대용량

안정적

24시간 전력을 어떤 전원 믹스로 충당할 것인가. IEA의 2025년 원자력 보고서는 원자력을 "안정적이고 배출이 적은 기저전력의 핵심 요소"로 평가한다. 반면 에너지경제금융분석연구소(IEEFA)는 같은 해 보고서에서, 현재까지 건설되거나 제안된 SMR들이 예상보다 훨씬 높은 비용과 더 긴 건설 기간을 보여주고 있으며 재생에너지가 단기 에너지 전환의 현실적 해법이라고 지적했다. 이 긴장이 첫 번째 축의 핵심이다.

2025년 현재, 전 세계에서 127개의 모듈형 원자로 설계가 개발 중이다. 7개 설계가 운영 또는 건설 중이고, 51개가 인허가 단계에 있다. 그러나 ITIF(미국정보기술혁신재단)의 냉정한 분석을 직시해야 한다: 전 세계에서 상업 운전 중인 SMR은 러시아(아카데믹 로모노소프)와 중국(HTR-PM)에 각 한 기씩, 단 두 기뿐이다. 투자와 열광은 약속에 의해 추동되고 있지, 현실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 아직 아니다.

그럼에도 자본은 이 약속에 몰리고 있다. NuScale Power는 미국 NRC(원자력규제위원회)의 설계 인증을 받은 유일한 SMR 기술로, 2026년 초 TVA(테네시밸리공사)와 6GW 규모의 SMR 배치 협약을 발표했다. 미국 에너지부(DOE)는 9억 달러를 SMR 상용화에 투입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2025년 11월 웨일스 윌파(Wylfa)를 자국 최초의 SMR 입지로 선정하고, 이를 AI 성장 구역과 연계했다. 아마존은 2024년 5억 달러 이상을 SMR 개발에 투입하겠다고 발표했고, 구글은 카이로스 파워(Kairos Power)와 파트너십을 맺어 2030년까지 500MW의 청정 전력을 확보하려 한다. 미국 기술 기업들은 지난 1년간 10GW 이상의 신규 원자력 발전 계약을 체결했다.

이 축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기저전력의 개념 자체를 확장하는 실험이다. 핀란드의 Steady Energy는 전기를 한 와트도 생산하지 않는 SMR을 개발하고 있다. 2023년 핀란드 국립기술연구소(VTT)에서 스핀오프한 이 회사의 LDR-50은 오직 150도의 열만 생산한다. 그 열로 도시 전체의 난방을 공급한다. 2025년 2월 12일, 헬싱키 구(舊) 살미사리 B 석탄발전소 터빈홀에서 실물 크기 파일럿 플랜트 착공식이 열렸다. 석탄을 태우던 자리에 원자로 모형이 들어선 것이다. Steady Energy의 CEO 토미 니만은 이렇게 말했다: "150도의 물을 데우는 것이 전 세계 탄소 배출의 10%를 차지한다. 우리 원자로는 오직 이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한다." 전기라는 범주를 넘어서는, 생존 조건의 직접 공급이다.

기술 보유 현황으로 보면, 미국은 핵융합과 차세대 원자력의 원천 기술을 장악하고 있다. 중국은 최초의 육상 상업용 SMR인 링룽원(ACP100, Linglong One)을 2026년 말 가동 예정이다. 한국은 배터리 셀 제조와 SMR 시공 능력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보유한다. 그러나 기술을 갖는 것과 그 기술로 자국의 대사를 자립시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 간극이 두 번째 축의 주제다.

축 2. 정치

지정학 — 대사의 자립이 곧 주권이다

1973년 OPEC의 석유 금수 조치가 서방 경제를 마비시켰을 때, 세계는 에너지가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처음 학습했다. 그러나 그 교훈은 반세기 만에 잊혀졌다. 2022년, 러시아가 노르드 스트림 파이프라인을 통한 가스 공급을 단계적으로 차단했을 때, 유럽은 같은 충격을 다시 겪었다. 독일의 제조업 원가는 치솟았고, 에너지 집약 산업들은 미국으로 이전을 검토했다. 에너지 종속은 곧 주권의 종속이라는 사실을 유럽은 수천억 유로의 대가를 치르고 재확인했다.

에너지의 무기화는 화석연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2023년 중국은 반도체 핵심 소재인 갈륨과 게르마늄의 수출을 통제했다. 중국이 전 세계 태양광 패널 생산의 80% 이상, 배터리 핵심 광물 정제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은, 재생에너지 전환 자체가 새로운 형태의 공급망 종속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화석연료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동으로 에너지 자립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 축에서 각국의 정책 전략은 극명하게 갈린다. 미국은 단일 에너지 경로에 올인하지 않는다. IRA(인플레이션 감축법)를 통한 재생에너지 내재화, LNG 수출 전략, 그리고 핵융합

SMR 투자를 동시에 병행하며 어느 한 공급망에도 종속되지 않으려는 유연성을 보인다. 중국은 다른 방향에서 같은 논리를 구사한다. 태양광

배터리

희토류 공급망 지배와 동시에 원전 확장과 핵융합 연구를 추진하는 전방위 전략이다.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겠다는 의지는 같되, 그 수단이 다르다.

한국의 위치는 이 구도에서 가장 불안하다. SMR과 배터리를 세계에 수출할 수 있지만, 에너지 수입 의존도는 여전히 90%를 넘는다. 남에게 팔 수 있는 에너지 기술은 갖고 있으되, 자기 몸의 혈액은 외부에서 수혈받는 구조다. 11차 전력수급계획에서 대형 원전 2기와 SMR 1기 건설을 계획하는 것은 이 비대칭을 해소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에너지 자립은 발전소 몇 기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나라가 밸브를 잠갔을 때에도 국가의 대사가 멈추지 않을 수 있느냐는, 공급망 전체의 설계 문제다.

축 3. 문명

윤리 — 기후 위기와 에너지 정의의 딜레마

에너지가 '문명의 혈액'이라는 은유가 진짜 뜻하는 바는 이것이다: 문명은 끊임없는 에너지 대사를 통해서만 살아 움직인다. 그러나 여기서 핵심 딜레마가 등장한다. 기존의 혈액(화석연료)은 지구 기후라는 대기(大器)를 오염시키고, 그 오염이 다시 문명 자체를 위협하는 피드백 루프를 만들어냈다. 문명의 혈액이 문명의 독이 된 것이다.

SMR과 핵융합은 이 딜레마에 대한 하나의 대응이다. 탄소를 배출하지 않으면서 기저전력을 유지하겠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이것을 '문명적 필연'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재생에너지의 급속한 비용 하락, 에너지 저장 기술의 발전, 수요 관리(Demand Response)의 가능성 — 탄소 제약 속에서 에너지 대사를 멈추지 않으려는 경로는 하나가 아니다.

여기서 에너지 정의(Energy Justice)라는 빠뜨릴 수 없는 문제가 등장한다. 어떤 에너지원을 우선시하느냐는 곧 누가 전력 부족의 위험을 감수하고, 누가 비용을 부담하며, 어떤 지역과 계층이 기후

핵

경제적 위험의 외부효과를 떠안느냐는 분배 문제와 직결된다. SMR은 안정적 전력을 제공하지만 그 입지 선정과 비용 분배는 특정 지역

계층에 집중될 수 있다. 재생에너지는 분산

민주적 가능성을 내포하지만, 계통 안정성 비용과 토지 사용이라는 또 다른 갈등을 낳는다.

2021년 2월 텍사스 한파는 이 문제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흘간의 전력망 붕괴로 공식 집계 246명이 사망했고, 연구자들의 추정은 최대 702명의 초과 사망이다. 사인(死因)의 거의 3분의 2가 저체온증이었다. 추위 자체가 살인자였지만, 전력망만 유지됐더라면 대부분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다.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에 2023년 게재된 연구에 따르면, 초과 사망은 소득 수준이 낮은 지역과 히스패닉

흑인 커뮤니티에 불균형적으로 집중되었다. 에너지 대사의 실패는 무차별적이지 않다. 가장 취약한 곳에서 가장 먼저, 가장 깊이 파고든다.

에너지 대사의 설계는 기술적 선택인 동시에 윤리적 결정이다. 어떤 혈액을 선택하느냐는, 문명이 자신의 가치와 생존 조건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문제다.

대사는 누가 실행하는가 — 에너지 기업이 진짜 파는 것

세 가지 축은 국가 대사의 설계도다. 그러나 설계도는 시공자가 없으면 종이에 머문다. 국가의 에너지 대사를 실제로 실행하는 주체는 에너지 기업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에너지 기업은 아직 스스로를 킬로와트시 판매 회사로 정의한다. 이 자기 인식의 빈곤이, 대사의 설계도를 현실로 번역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병목이다. 이 기업들은 자기가 무엇을 파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가.

교과서의 답은 세 가지다. 전기(electricity), 열(heat), 연료(fuel).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셰익스피어를 "26개의 알파벳 조합"이라고 설명하는 것만큼 맞고, 그만큼 쓸모없는 답이다.

대사의 관점에서 보면, 에너지 기업이 실제로 거래하는 것은 다섯 가지다. 이 다섯 가지는 앞서 논한 세 축이 기업의 사업 모델로 번역된 결과물이다.

하나, 확실성(Certainty)

축 2에서 국가가 에너지 자립을 추구하는 이유가 불확실성의 제거였듯, 기업 수준에서도 동일한 논리가 작동한다. 기업들이 장기 전력구매계약(PPA)에 수십 년치 프리미엄을 지불하는 이유는 전기가 비싸지 않아서가 아니다. 불확실성이 더 비싸기 때문이다. SMR처럼 24시간 안정 출력이 가능한 기저전력을 보유한 기업만이 30년짜리 가격 고정 계약을 팔 수 있다. 기후 위기와 지정학적 불안이 심화될수록, 이 확실성에 기업들이 기꺼이 지불하는 프리미엄은 커진다.

둘, 시간의 밀도(Density of Time)

서장에서 논한 바와 같다. 불에서 석탄으로, 석탄에서 석유로, 석유에서 원자력과 AI로 — 매 단계마다 에너지는 인간이 단위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의 양을 결정해왔다. 에너지 기업은 킬로와트시를 파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시간을 압축하는 기계를 파는 것이다.

셋, 물(Water)

NuScale의 연구에 따르면, SMR 한 기를 역삼투압 담수화 시스템과 결합할 경우 하루 약 1억 5천만 갤런의 담수를 생산할 수 있다. 12기를 운용하면 인구 230만 명의 도시에 깨끗한 물을 공급하면서도 40만 가구에 전력을 동시에 공급할 수 있다. Steady Energy의 LDR-50도 담수화 플랜트로 전환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UN은 2050년까지 약 50억 명이 물 부족을 겪을 것으로 전망한다. 이 경고가 현실이 된다면, 에너지 → 담수 → 식량이라는 사슬의 끝에서 에너지 기업은 식량 안보 기업이 된다.

넷, 탄소 흡수 —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 상품

대기 중 직접 탄소 포집(DAC: Direct Air Capture)은 막대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현재 DAC가 상업적으로 실현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술이 아니라 에너지 비용이다. 미래의 가능성으로서, 핵융합 기반의 전력이 충분히 저렴해진다면 DAC의 경제학은 뒤집힐 수 있다. 미국 에너지부는 이미 SMR과 DAC의 결합을 공식 정책 의제로 다루고 있다. 다만 핵융합 상용화 자체가 아직 순에너지 생산(net energy gain)의 지속적 달성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단계라는 점은 직시해야 한다. 2025년 Commonwealth Fusion Systems가 8.6억 달러를 유치한 것은 자본의 기대를 보여주지만, 기대와 현실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멀다.

다섯, 의식(Consciousness)과 기억(Memory)

가장 대담한 명제이자 가장 핵심적인 명제다. AI가 소비하는 전력의 본질은 패턴 인식, 언어 생성, 의사 결정 — 요컨대 생각이다. 인간의 사고가 뉴런을 통해 전기화학 신호로 구현되듯, AI의 사고는 GPU를 통해 전류로 구현된다. 한국전력이 삼성전자 데이터센터에 파는 전기는, 동시에 그 데이터센터 안에서 운용되는 AI의 모든 사유(思惟)의 물리적 기반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 기억이 있다. 디지털 문명에서 인류의 모든 기억 — 사진, 영상, 문서, 대화, 음악 — 은 서버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 그 서버를 켜두는 것은 전기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담긴 음성 파일, 아이의 첫 걸음마 영상, 사라진 언어의 마지막 기록 — 이것들은 전기가 흐르는 한 존재하고, 전기가 끊기는 순간 사라진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운 것은 화염이었다. 21세기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지키는 것은 전기다. 에너지 기업의 가장 심층적인 정체성은 문명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수호자다.

물론, 이것은 오늘의 에너지 CEO들이 스스로의 사업을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러나 에너지 산업의 근본적 정체성을 다시 묻는 자만이 다음 세대의 사업을 설계할 수 있다.

한국의 질문 — 우리는 무엇을 파는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에너지 시공(施工) 능력을 가지고 있다. 배터리 셀, SMR 건설, 반도체 — 이 모든 것이 에너지 대사의 정밀 부품들이다. 이것은 혈관을 세공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혈관만으로는 심장을 대체할 수 없다. 한국의 에너지 기업들은 여전히 킬로와트시 단위로 매출을 계산한다. 정교한 혈관을 만들 줄 알면서, 자기 몸의 심장은 외부에서 수혈받는 구조다.

만약 한국의 에너지 기업이 — 그리고 한국이라는 국가가 —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킬로와트시를 파는가, 아니면 확실성을 파는가?"

"우리는 증기를 파는가, 아니면 물 부족 국가에 생존 조건을 파는가?"

"우리는 발전소를 수출하는가, 아니면 문명 인프라를 수출하는가?"

SMR 수출 전략이 단순히 원전 수주를 넘어서는 순간, 한국은 체코에 발전소를 파는 것이 아니라 체코 산업의 에너지 확실성을 구독 형태로 공급하는 파트너가 된다. 전기

물

수소

산업열을 동시에 생산하는 SMR 복합 출력을 도시에 통째로 패키지화하는 사업 — CaaS(Civilization as a Service) — 이 그 형태다. Steady Energy가 헬싱키에 '얼어 죽지 않을 권리'를 팔듯, 한국은 중동에 '갈증 없는 미래'를, 동남아에 '멈추지 않는 심장'을, 유럽에 '미래 전력 가격을 보증하는 시간 거래소(Time Exchange)'를 팔 수 있다.

이것은 비즈니스 모델의 변화가 아니다. 국가 정체성의 변화다.

정원사 국가(Gardener State)라는 개념을 내가 일찍이 제안했거니와, 에너지 정원사는 단지 전력을 심어주는 자가 아니다. 그 땅에서 물과 수소와 탄소 포집과 디지털 사고가 동시에 자랄 수 있는 토양을 설계하는 자다.

결론: 세 가지 명제

첫째, 에너지는 자원 이상의 것, 곧 대사다. 불에서 석탄으로, 석탄에서 석유로, 석유에서 원자력과 AI로 — 매번 문명이 요구하는 대사의 밀도는 한 차원 높아졌다. SMR

핵융합

배터리

태양광

데이터센터는 이 거대한 대사 체계를 구성하는 장기(臟器)들이다. 하나가 막히면 국가 전체의 대사가 위협받는다. 그러나 이 체계의 설계는 기술적 선택인 동시에 정치적

윤리적 결정이다.

둘째, 단일 기술에 올인하는 국가는 취약하다. SMR과 핵융합은 기후 제약 속에서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대사 설계의 유력한 후보다. 그러나 경제성

안전성

건설 기간의 현실적 한계를 직시하면서, 재생에너지

수요 관리와의 최적 조합을 끊임없이 재조정해야 한다. 유연한 복합 전략을 설계하는 국가가 패권을 쥔다.

셋째, 에너지 기업은 전기를 팔지 않는다. 그들이 진짜 파는 것은 확실성이고, 압축된 시간이고, 물이고, 깨끗한 대기이고, 문명의 의식과 기억이다. 가장 단순하게 말하면 — 에너지 기업은 불꽃이 꺼지지 않게 하는 약속을 판다.

에너지 대사를 가장 안정적으로, 가장 공정하게, 그리고 가장 지속 가능하게 설계하는 국가가 21세기의 생존자이자 패권자다.

김형기

이 기사 공유하기
페이스북X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i

댓글

0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이 기사에 첫 의견을 남겨보세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