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요즘 같은 때엔 중동 전쟁 이슈라도 있어야 가격 인상할 명분이 생긴다."
유통업계 관계자들이 여럿 모인 식사 자리에서 한 기업 담당자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었다. 이에 기자가 "왜 가격 인하할 명분이 생기면 제품가를 내리지 않느냐"라고 묻자, 그는 아무말도 내뱉지 못했다.
다만 최근 식품기업들 모습은 조금 달랐다. 정부가 물가 안정 기조에 고삐를 바짝 당기고 있는 가운데 '담합'부터 손을 대자, 울며 겨자먹기로 가격 인하에 줄줄이 나선 것이다.
초콜릿의 주원료인 카카오 가격 급락을 보자. 인베스팅닷컴에 따르면 국제 카카오 선물 가격은 2025년 5월 톤당 1만 달러 수준까지 치솟았지만 현재 약 3389달러로 66% 넘게 떨어졌다.
그러나 식품업계는 최근까지만 해도 카카오 가격 하락에도 기타 제반 비용 상승 등을 이유로 가격 인하 요인이 충분하지 않다는 논리를 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해명이 궁색하다고 지적한다. 원가 비중이 가장 큰 핵심 원재료 가격이 반토막 났음에도, 다른 비용을 핑계 삼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제분업계와 제당업계의 담합 의혹을 정조준하며 조사에 착수하자, 업계는 벼랑 끝에 섰다. 제당·제분업체들이 밀가루와 설탕 가격을 인하하고, 정부가 민생물가 특별관리 TF를 출범시키는 등 물가 안정 기조를 강조하면서 식품업계 전반에서 가격 인하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2월까지만 해도 가격 인하 계획에 대해 즉답을 피했던 업계가 3월 들어 정부가 서슬퍼런 칼날을 들이대자, 그제서야 꾸역꾸역 가격 인하에 나선 모습이다. 실제 롯데웰푸드와 빙그레, 삼립, 해태제과, 오리온 등이 정부 눈치를 보며 가격을 뒤늦게 내렸다.
하지만 이마저도 진정성이 의심스럽다. 식품업계가 정부 기조에 동참한다며 제품 가격은 낮췄지만, 업체별 주요 제품은 가격 인하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인하 폭이 낮았다는 것이다. 정작 소비자가 가장 자주 구매하는 스테디셀러 제품 가격이 그대로라면 체감상 '가격 인하'의 의미가 있을까. 단기적 대응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을 터.
지난 2024년 12월 식품업계는 카카오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값이 평년의 두 배 넘게 뛰었다며 곧바로 제품 가격을 최대 12%까지 올렸다. 가격 인상에는 명분을 찾고 원재료 부담 요인을 운운하며 앓는 소리를 하는 식품업계가 가격 인하에는 소극적인 모습이 소비자들은 달갑지 않을 것이다.
원재료값이 내려갔다면 그만큼 인하 분이 제품 가격에도 반영돼야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물가도 내려갈 것이다. 그래야 기업들의 '가격을 내렸다'는 발표와 소비자들이 느끼는 '여전히 비싸다'는 현실 사이의 간극이 좁혀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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