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인권실사는 정책과 선언에 그치지 않고 노동자·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와의 소통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사진=픽사베이 제공
[ESG경제신문=김제원 기자] 국내 주요 기업 50곳을 대상으로 인권실사 평가를 진행한 결과, 기업들은 인권을 존중하겠다는 정책이나 선언은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를 실제 현장에서 실행하는 체계는 아직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분석됐다. 현재 기업 ESG경영 중 사회(S)영역에서 "원칙은 써놨지만, 실제로 문제를 찾고 해결하는 시스템은 충분하지 않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대한변호사협회와 사단법인 휴먼아시아는 21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 의원회의실에서 ‘기업 인권실사 평가 발표 및 과제 컨퍼런스’를 열고 이런 내용을 공개했다. 이번 평가는 사기업 40곳과 공기업 10곳, 모두 50개 기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이번 평가에서는 기업인권 벤치마크(CHRB)의 핵심지표가 사용됐다. 이 지표는 기업이 유엔 기업과 인권 이행원칙의 핵심 요구를 얼마나 이행하고 있는지 빠르게 점검하는 기준이다.
사기업 평가 결과
사기업 인권실사 평가 결과. 표=대한변호사협회
먼저 사기업 평가 결과를 보면, 회사마다 차이가 꽤 크게 나타났다. 평가 항목을 크게 나누면 ▲정책적 약속(A) ▲회사 안에 인권 존중을 실제 업무로 녹여냈는지(C) ▲인권실사(D) ▲고충처리·구제(E)로 구분되는데, 사기업 40곳의 평균 충족률은 ▲(A) 79.1% ▲(C) 61.3% ▲(D) 52.4% ▲(E) 62.6%였다.
이 가운데 가장 낮은 항목은 D, 즉 인권실사였다. 발표를 맡은 이근우 변호사는 많은 기업이 인권 관련 정책을 만들고 외부에 공개하는 데는 비교적 적극적이었지만, 실제로 인권 리스크를 찾고 평가하고 조치하고 다시 점검하는 과정은 상대적으로 약했다고 설명했다.
사기업 순위를 보면 현대건설이 12점으로 1위였고, LG전자 11.07점, 네이버 11.00점이 그 뒤를 이었다.
삼성전자와 카카오는 각각 10.16점으로 공동 4위였다. 반면 하위권에는 쿠팡 1.25점, NH농협금융지주 1.75점, 하이브 2.25점 등이 포함됐다. 전체 40개 기업 가운데 10곳은 6점 미만이었다.
업종별 평균 점수는 IT·반도체 10.16점, 건설·기계 9.22점이 높았고, 자동차·조선·항공 6.56점, 금융 6.08점, 유통·식음료 6.23점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같은 기업 평가라고 해도 어떤 회사는 인권경영 체계를 비교적 잘 갖춘 반면, 어떤 회사는 아직 출발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특히 하위권 기업들은 단순히 점수가 낮은 수준이 아니라, 인권실사 체계와 고충처리 시스템 같은 기본 구조부터 더 보완해야 하는 상황으로 평가됐다.
공기업 평가 결과
공기업 인권실사 평가 결과. 표=대한변호사협회
공기업 평가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공기업 10곳의 평균 점수는 6.46점이었고, 항목별 평균 충족률은 ▲(A) 65% ▲(C) 65% ▲(D) 45.16% ▲(E) 53.23%였다. 여기서도 가장 낮은 것은 D, 즉 인권실사였다.
휴먼아시아 기업과 인권센터 우용원 연구원은 공기업들이 인권경영 보고서를 발간하고 제도를 갖춰온 경험은 있지만, ▲공급망 단계의 인권실사 ▲외부 이해관계자와의 소통 ▲조치 이후 효과 점검에서는 부족한 점이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공기업은 사기업과 비교했을 때 몇몇 항목에서 더 낮은 충족률을 보였다.
대표적으로 유엔 기업과 인권 이행원칙(UNGP)과 OECD 가이드라인 이행 약속을 포함한 정책 성명 부문에서 점수가 낮았다.
공급망 안에서 인권 리스크와 영향을 어떻게 찾고 평가하는지 설명하는 항목도 미흡했으며, 공급망 근로자들이 고충처리 절차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부분 역시 낮은 점수를 받았다.
요소별로 세부 분석한 결과 평가 대상 기업 중 공기업은 다음 요소들의 충족률이 사기업 대비 낮게 도출되었다. 자료=대한변호사협회
보완 과제
이번 발표에서는 평가 결과뿐 아니라 앞으로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지도 함께 제시됐다. 송시현 변호사는 한국 주요 기업들이 국제 규범에 맞춘 인권정책과 약속을 세우고, 인권실사와 구제 이행 의지를 외부에 밝힌 점을 언급했다.
다만 남은 과제로는 인권위험 식별이 형식적으로 이뤄지는 점, 이해관계자 참여가 제한적인 점, 구제 체계의 투명성이 부족한 점, 공급망 실사가 구조적으로 비어 있는 점을 제시했다.
기업에 대한 과제로는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독립적 실사가 제안됐다. 특히 공급망, 해외사업, 취약집단 관련 문제는 회사 내부 인력만으로 점검하기 어렵기 때문에, 현장 조사와 인터뷰, 고충처리 시스템 점검 등을 포함하는 외부 실사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또 인권실사를 특정 부서만의 업무가 아니라 경영 전반에 녹여야 하며, 이를 위해 이사회의 감독 책임을 분명히 하고, 경영진 성과지표(KPI)에 인권 요소를 반영하고, 법무·컴플라이언스 조직 중심으로 실사 체계를 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중대한 이슈에 대응하거나 정책 효과를 평가할 때도 이해관계자 참여 절차를 제도화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공급망 관리에 대해서는 행동강령을 만들거나 계약서에 관련 문구를 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밝혔다.
실제 점검, 지속적인 모니터링, 문제 발견 뒤 개선 조치까지 이어지는 관리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적용 범위도 1차 협력업체에만 머무르지 말고 단계적으로 넓혀야 한다고 했다. 고충처리와 구제에 대해서는 피해자 중심의 실질적 구제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기업 외 주체들에 대한 과제도 제시됐다. 시민사회에는 ‘인권 워싱’을 감시하고 이해관계자 참여를 확대하는 역할이, 투자자에게는 인권 관련 평가 데이터를 투자 결정에 반영하고 투자기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역할이 요구됐다.
법조계에는 문제가 발생한 뒤 대응하는 데 그치지 말고, 사전에 인권 리스크를 설계·관리하는 쪽으로 역할을 넓혀야 한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인권실사 전략 자문, 공급망 계약 구조 검토, 고충처리 시스템 설계, 외부 독립 실사 수행 등이 제시됐다.
한편, 이상수 휴먼아시아 기업과 인권센터장은 기업과 인권(BHR), 유엔 기업과 인권 이행원칙(UNGP)을 둘러싼 국제적 요구가 커지고 있지만, 정작 한국 기업들의 인권경영 수준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정보는 부족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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